[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3] 안용복을 어찌할 것인가, 조선 조정의 갈등

※ 본 시리즈는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안용복 선생님의 역사적 행적을 중심으로 구성된 콘텐츠입니다.
중요한 문헌인 만큼 전문(全文)을 빠짐없이 소개하되, 긴 내용을 보다 쉽게 읽으실 수 있도록 의미 단위로 나누어 번역하여 연재하고자 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1696년 9월 27일 (숙종 22년) 2부]
[원문 및 번역]
6. 上曰, 諸臣所見, 何如?
→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7. 左議政尹趾善曰, 安龍福罪犯, 更無容貸之事, 不必久囚, 而領相所達, 誠然, 依此爲之, 似好矣。
→ 좌의정 윤지선이 말하기를, “안용복의 죄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래 가둘 필요도 없으며, 영의정이 보고한 대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8. 柳尙運曰, 昨日, 使刑曹判書金鎭龜, 往問於不入侍大臣處矣。使之仰達, 何如?
→ 유상운이 말하기를, “어제 형조판서 김진구를 입시하지 않은 대신들에게 보내어 의견을 구했는데, 그 내용을 임금께 보고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9. 金鎭龜曰, 臣以領相之言往問, 則右議政徐文重以爲, 龍福爲人, 雖曰愚濫, 而此事所關, 亦爲不輕。
→ 김진구가 말하기를, “신이 영의정의 말씀을 가지고 가서 우의정 서문중에게 물었더니, 그는 ‘안용복이 비록 어리석고 경솔한 인물이긴 하나, 이번 사건이 관련된 사안은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10. 自古交隣之事, 初似微細, 而或至於大段矣, 卽今對馬島, 居在兩國之間, 則勿論事之大小, 必以誠信待之, 無有隱諱, 似宜矣。
→ “예로부터 이웃 나라와의 외교는 처음에는 사소해 보여도 나중에 큰 사태로 번지기 쉬웠습니다. 지금 대마도는 양국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므로, 사안이 크든 작든 항상 성실하고 숨김없이 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설] 안용복 문제, 조정의 공식 입장은 어떻게 결정되었나?
안용복이 일본에서 상소문 형식의 문서를 받고 돌아온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 사건을 외교 시스템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좌의정 윤지선은 안용복을 “더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규정하며, “오래 가둘 것도 없이 신속히 처형하자”는 강경한 입장을 보입니다.
반면 우의정 서문중은 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입니다. 안용복이 경솔한 인물이긴 하나, 그가 벌인 일은 외교의 기본 질서를 해칠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며, 사소한 일도 이웃나라 사이에선 큰 분쟁으로 번질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중간 통로로 삼아 외교를 수행했던 당시의 관례가 언급됩니다. 즉, 조선은 일본과 직접 상대하지 않는 ‘상국(上國) 외교’의 형태를 고수해 왔고, 일본 역시 대마도를 통해 조선을 상대하며 대등한 외교를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안용복이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일본 본토(伯耆州)에서 문서를 받은 후 곧장 귀국했다는 점, 그리고 그 문서가 대마도주를 질책하는 듯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점은, 조선의 입장에서도, 일본의 입장에서도 전례를 깨뜨린 큰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이 당황한 이유는 단순히 문서의 내용 때문만은 아닙니다.
양국이 외교적으로 상대방을 서로 낮추며 직접 대면을 피하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안용복이 보여준 행위는 조선의 ‘상국 외교’ 원칙을 스스로 위태롭게 만든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참고 자료
▪︎ 『승정원일기』 숙종 22년(1696년) 9월 27일자
▪︎ 국사편찬위원회 디지털 원문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원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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