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속 인물과 기록/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5] [2-16] ~ [2-20] 곤장 이전의 논의들, 조선은 왜 그를 혼자 내몰았는가

CurioCrateWitch 2025. 5. 12.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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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정은 안용복의 처벌을 전제로 하되, 형벌을 유보하고 일본의 반응을 먼저 살펴 보자는 입장과, 즉각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습니다.

이번 회의록에는 그런 판단의 갈림길에 선 조정의 흔들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6. 金鎭龜曰...

▪︎  金鎭龜曰, 安龍福不可容貸之事, 諸臣旣已陳達矣, 臣亦無他所見矣。對馬島主處, 則不可不速爲通告, 而處置事, 姑觀前頭事機而爲之, 未晩矣。

→ 김진구가 말하길, “안용복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는 점은 여러 신하들이 이미 말씀드린 바이며, 저 역시 따로 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다만 대마도주에게는 이 사실을 서둘러 통보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처벌 문제는 앞선 정세를 살핀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해설: 김진구는 의견을 내기보다 기존 강경론에 동조하면서도, 형벌 집행의 시점은 유보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처벌은 하되, 굳이 지금은 아니다’라는 판단이 깔려 있으며, 외교적 통보는 강조하면서도 조선 내부의 결단은 미루는 모습입니다.



17. 吳道一曰...

▪︎ 工曹參判吳道一曰, 龍福, 當斷一罪, 彼國之傳通事情, 事理皎然, 諸臣之議歸一, 臣固無用更議, 而但念安龍福之罪狀, 只是關係邊情, 事體重大而已。 實則愚蠢之人, 希功罔上而已, 若竝與仁成而正法, 則誠恐過重, 仁成則次律施行, 似合矣。

→ 공조참판 오도일이 말하길, “안용복은 명백히 죄를 지은 자로 판단됩니다. 일본과의 연락 사정도 분명하고, 신하들의 의견도 하나로 모였으니 제가 따로 다른 의견은 없겠습니다. 다만 그의 죄상은 국경 문제와 연관되어 사안이 중대하며, 실은 어리석은 자가 허명을 바라고 경솔한 행동을 한 것이라 여깁니다. 그를 이인성과(※ 이인성은 안용복과 함께 일본에 건너간 인물로, 주범은 아니나 일정 부분 협력한 것으로 보임)과 함께 법대로 처리하면 처벌이 지나칠까 우려되며, 이인성은 차등 있게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설: 오도일은 안용복의 죄를 인정하며,
그의 동기를 ‘허명을 좇은 어리석은 자’로 규정해 공익적 행위에서 개인적
욕망의 결과로 해석합니다.

또한, 신하들의 의견이 모여가고 있다는 언급은
조정 내부의 판단이 점차 정리되어가는 흐름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조정이 안용복을 외교적 공헌자라기보다는 통제가 안 되는 충동적인 인물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인성과의 차등 처벌 제안은 조정이 책임의 경중을 조율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며,

그 흐름 속에서 안용복의 죄가 가장 무겁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8. 金鎭龜曰...

▪︎  金鎭龜曰, 延安人金順立, 自襄陽先往他處, 故袐關于開城府及延安等處, 以爲捉來之地, 而姑無形影, 待其入來後, 似當一時處置矣。

→ 김진구가 말하길, “연안 사람 김순립은  양양에서 다른 곳으로 떠났기에 개성부와 연안 등지에 수색을 지시했고,
(※ 김순립은 안용복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던 일행 중 한 명으로 추정되며, 당시 조정은 그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 들어오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해설: 이 부분은 안용복 외의 연루자, 김순립에 대한 처리 방향을 언급한 것으로,
조정은 일단 주범인 안용복에 대한 조치를 우선한 후,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차후 상황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보입니다.
사건의 핵심이 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사건 처리의 우선순위와 조정의 일관된 대응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 徐宗泰曰...

> 行副司直徐宗泰曰, 此事雖未有前頭憑問之端, 事或有不可知者, 其爲處斷, 旣非時日爲急, 姑爲更觀彼島聲息而處之, 爲當矣。

→ 임시 부사직 서종태가 말하길, “이 일은 아직 신문이나 조사가 없고, 사건의 전말 또한 불확실하니 서둘러 결단할 일은 아니며, 일본 측 반응을 좀 더 지켜본 후 처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해설:  서종태는 사건에 대한 조사나 신문이 선행되지 않았음을 들어,
성급한 형벌 논의에 신중론을 제기합니다.
그의 발언은, 사건의 전말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이미 형벌부터 논의하고 있던 조정의 다소 과열된 반응을 부각시키며,
당시 조정이 전례 없는 외교관례 파괴 상황에 당황해,
사실 확인보다는 외교적 충격에 휩싸여 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20. 上曰...

> 上曰, 專主此事者, 安龍福也。勿論飄風犯境與否, 而爲此擧措, 其罪決不可貸也。 且對馬島, 居在兩國之間, 則龍福, 所當自馬島付送, 而今則直自伯耆州送來, 旣非前例, 且爲上疏, 詆毁島主, 則日後島主, 必無不知之理, 似不可不通告於對馬島, 而待其渡海譯官之歸, 處之, 尤爲詳備矣。

→ 임금이 말하길, “이번 일의 중심은 안용복이다. 풍랑 여부를 따지지 않더라도, 이런 행동을 한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대마도는 양국 사이에 있는 곳인데, 안용복이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일본 본토로 곧장 간 것은 전례에도 어긋난다. 게다가 거기서 상소를 올리고 도주를 모욕했으니, 도주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대마도주에게는 반드시 통보해야 하며, 통역관이 돌아온 뒤에 그 반응을 보고 처리하는 것이 더욱 신중할 것이다.”

해설: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흔으로 일본과의 직접 교섭을 오랫동안 꺼려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백여 년 만에 한 민간인이 일본의 중앙 권력인 에도 막부와 직접 교섭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울릉도와 독도 문제에서 성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주체가 조정이 아닌 촌부였다는 점에서 조정의 셈법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외교는 관계이고, 관계는 상대적인 법. 조정은 안용복의 공로와 성취를 기뻐하고 축하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벌어질 국내외적인 정치·외교적 파장을 더 걱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자료

▪︎ 『승정원일기』 숙종 22년 9월 27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안용복과 조선후기 대일외교》, 김문식

▪︎ 《17세기 조선과 대마도의 외교적 갈등 양상》,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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