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우리 땅/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숙종 23년 윤 3월 3일 (1697년) [7] 조선의 실리 외교가 그를 밀어낸 방식

CurioCrateWitch 2025. 5. 29.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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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처벌 논의의 끝자락에 서다
― 조선의 실리 외교가 그를 밀어낸 방식 ―


[7]  숙종 23년 윤 3월 3일 (1697년)
남구만과 다른 대신들의 의견

📜 원문


臣見領府事南九萬, 則以爲安龍福出來之後, 知其奸情, 事當責諭於彼中, 龍福擅入他國之罪, 法當梟示, 而兩件事, 皆已後時, 事機亦有不得率爾處置者, 至於書契, 則因其所請而成給, 爲宜云。他大臣之意, 亦皆如此矣。上曰, 見其狀啓措語, 則倭人必欲受去書契云。彼旣如是懇請, 成給書契, 可也。

📚 번역

"신이 영의정 남구만을 만나 뵈었더니,
안용복이 돌아온 뒤 그의 간사한 정황을 알았으므로, 마땅히 일본 측에 책임을 물어 깨우쳐야 하며, 안용복이 함부로 타국에 들어간 죄는 법에 따라 효시(梟示)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일(안용복 문제와 서계 문제) 모두 시기가 늦었고, 지금은 경솔하게 처리할 수 없는 시기이므로, 서계에 대해서는 일본의 요청대로 발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대신들의 뜻 또한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장계의 표현을 보니, 왜인들이 반드시 서계를 받아가려 하는구나. 저들이 이토록 간절히 청하고 있으니, 서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옳다."


🔍 해설 | 안용복, 조선 외교 전략 속에서 밀려나다

1697년 3월, 조선 조정은 두 가지 외교 현안을 놓고 논의 중이었습니다.
하나는 안용복의 일본행 문제에 대한 조선의 입장 정리, 다른 하나는 일본 측이 강하게 요구한 공식 서계 발급 문제였습니다.

이날 논의의 핵심은 ‘어떻게 외교적 부담을 최소화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안용복 선생은 점점 국가 외교 전략의 ‘문제 요소’로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 남구만의 입장: “법에 따라 효시해야”

영의정 남구만은 안용복의 행동을 ‘타국 무단 침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법대로 효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며, 조선의 외교 원칙이 흔들리는 것을 가장 우려했습니다. 자칫 조선이 안용복의 행동을 묵인한 것으로 비칠 경우,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도 함께 보았습니다. “이미 때가 늦었다.” 사안의 시의성이 지나갔고, 외교 상황도 급변한 시점에서
더 이상 안용복 문제를 들춰서 얻을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 대신들의 합의: 현실을 택하다

남구만의 견해는 조정의 다른 대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안용복을 두둔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고, 서계 발급 요구는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처럼 조선 조정 내부에는 외교 원칙보다 현실을 우선시하는 실리 외교 기조가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숙종의 결단: 논란을 종결하다

숙종은 동래부사의 장계를 보고 난 뒤
“왜인들이 반드시 서계를 받아가려 한다”며, 요청을 수용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이는 숙종이 감정보다 실리를, 국가 체면보다 외교 안정성을 택한 정무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곧, 안용복에 대한 처벌 논의가 조용히 막을 내리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안용복, 그렇게 조용히 밀려났다

이 장면은  “신경 쓰지 마라(勿煩)”는 숙종의 최종 선언이 나오기 바로 직전의 공식 논의입니다.
실제로 안용복 선생의 이름은 이 시점을 끝으로, 점차 조정의 입 밖에 오르내리지 않게 됩니다.

💬  서계(書契)란?

서계(書契)는 조선이 외국에 보내던 공식 외교 문서입니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국왕의 뜻을 담아 보내는 서한 형식으로, 국가 간 입장을 전달하는 중요한 문서였습니다.


📌 일본이 요구한 서계의 핵심 내용 (1696년, 숙종 22~23년 당시)

✅ 1. 안용복 처벌 및 조선의 입장 표명


안용복이 일본(쓰시마를 거치지 않고 본토)으로 건너가 독도와 울릉도는 조선 땅이라고 주장한 사건에 대해, 일본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습니다:

안용복은 국경을 넘은 죄인이므로, 조선이 자국민을 엄벌하고, 그에 대해 일본에 공식적인 사과 혹은 입장 표명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조선 국왕의 명의로 “재발 방지”와 “적절한 조치”를 약속하는 서계를 요구한 것입니다.


✅ 2. 울릉도·독도 어민 출어(出漁) 금지 확약

일본은 당시 조선 어민들이 울릉도와 독도 해역에 출어(조업)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압박했고, 그 조치를 공식 문서로 확약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요약하면:

"앞으로 조선 어민들이 울릉도나 독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겠다"는 약속을 조선 국왕의 서계 형태로 일본에 명문화해서 보내 달라는 것이었죠.


🧭 조선의 대응

조선 조정은 같은 날 이 두 건의 요구(안용복 문제, 출어 금지)에 대해 각각의 서계를 작성하는 대신, 하나의 서계에 두 내용을 통합해 회신하기로 결정합니다.
→ 이는 최석정의 제안으로, 숙종이 즉각 승인했어요


崔錫鼎曰, 彼之所請者, 兩度書契, 而合而爲一度, 似可矣。上曰, 一書契合兩款爲之, 可也。[숙종 23년 윤 3월 3일 (1697년)]

최석정이 아뢰기를, "저들이 청한 것은 두 번의 서계인데, 이것을 합하여 한 번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한다." 임금이 이르기를, "하나의 서계에 두 가지 내용을 합하여 작성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조선은 안용복을 밀어냈지만,
우리는 지금, 그를 다시 불러내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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