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우리 땅/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숙종 37년 2월 21일 (1711년) 존재의 증명, 안용복 ― 그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CurioCrateWitch 2025. 5. 3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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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숙종 37년 2월 21일 (1711년)
존재의 증명, 안용복 ― 그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 원문


竊照我國地方, 東南際海, 與之爲仇而爲之備者, 海中之倭奴而已。當知其海路衝要, 而爲之備禦, 臣謹稽前人文字, 詢之海氓漂人等, 則倭之地方, 以間島爲地盡頭, 而間島之右, 則海波連接於我國之寧海·平海等處, 而千里無島, 波濤洶浩, 不可以涉。在昔高麗睿宗時, 倭舶數隻, 來圍三陟, 頃歲邊氓安龍福, 自鬱陵島, 爲漁倭所執, 四晝三夜, 始至倭國之伯耆州, 而去時只見一島在海中, 前後寧海·長鬐等漂氓, 漂數晝夜便達倭奴之長門·伯耆等處, 卽水勢極洶, 不見島嶼云, 此我國與倭奴, 東界相接之海路也。


📚 번역

감히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는 동남쪽이 바다에 맞닿아 있고, 이웃한 적국으로 경계하고 대비해야 할 존재는 바다 건너의 왜인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해상 경로의 요충지를 잘 알고 그에 맞는 방비를 해야 마땅합니다.

신은 삼가 옛 문헌들을 조사하고, 해상을 떠돌다 표류한 자들로부터도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왜의 지역은 간도(間島) (여기서 '간도'는 당시 일본 본토의 서쪽 끝, 즉 규슈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아는 만주의 '간도'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를 끝자락으로 삼고 있으며, 그 오른쪽은 바다가 곧바로 우리나라의 영해(寧海) (오늘날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일대)와 평해(平海) (오늘날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일대) 등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 천 리 길 (여기서 '천 리 길'은 대략적인 거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영해-평해 해역에서 일본 본토 서쪽 끝까지의 해상 거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구체적인 시작점과 끝점은 명확히 지정되지 않았으나, 동해를 가로지르는 광활한 해역을 의미한다)에 섬 하나 없고, 물결은 격렬하여 건너기 어렵다고 합니다.

옛 고려 예종 때에도 왜선 몇 척이 삼척(三陟)(강원도 삼척)을 포위한 일이 있었고, 얼마 전 변방 백성 안용복이 울릉도에 있다가 어업 중이던 왜인에게 붙잡혀 사흘 밤낮을 항해한 끝에 일본의 백기주(伯耆州, 호키슈) (오늘날 일본 돗토리현 서부에 해당하며, 시마네현과 인접한 지역)에 도착했는데, 떠날 때 보인 섬은 바다 한가운데 단 하나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안용복이 울릉도를 떠날 때 보인 '바다 한가운데 단 하나의 섬'은 독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울릉도와 일본 오키 제도 중간에 위치한 독도가 당시에도 중요한 지리적 이정표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과거 영해나 장기(長鬐) (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일대) 등지의 백성들이 표류하여 수일간 떠다닌 뒤에도 왜인의 장문(長門) (오늘날 일본 야마구치현 서부에 해당)이나 백기(伯耆) (위에서 언급된 백기주, 즉 호키슈와 동일한 지역) 등지에 도착했다고 하니, 그 해역은 물살이 아주 거세고 섬 하나 없는 바다였습니다. 이는 곧 우리나라와 왜가 동쪽 경계에서 직접 맞닿아 있는 해로임을 뜻합니다.


🔍 해설|기록의 마지막, 그러나 존재의 증명: 안용복, 동해를 증명하다

1711년, 숙종 37년의 이 기록은 울릉도와 독도 수호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던 안용복 선생의 이름이 숙종 시대의 공식 기록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언뜻 보면 동남 해안 방어를 위한 금정산성 축성 요청 상소문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 안에 조용히 삽입된 한 문장은 역사에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변방 백성 안용복이 울릉도에 있다가 왜인에게 붙잡혀 사흘 밤낮을 항해하여 일본 백기주(伯耆州, 호키슈)에 도착하였다."

이 한 문장은 그 어떤 평가나 논쟁 없이, 조선이라는 국가가 남긴 마지막 인정이자, "그는 실제로 존재했다"고 기록에 새겨둔 최후의 목격담입니다.

당시 조정은 안용복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외면하거나 축소하려 했고, 그를 월경(越境) 죄인으로 다루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끝내 지우지 못했습니다. 이 구절은 단지 바다 건너 일본이 있고, 그 땅에 울릉도에서 끌려간 조선 백성 안용복이 도착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이에 섬 하나 없는 험난한 해역이 있었다는 담담한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조정의 태도와는 별개로 민중들 사이에서 안용복의 이야기가 얼마나 생생하게 기억되고 회자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그를 죄인으로 취급했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의 행동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안용복이 울릉도를 떠날 때 "바다 한가운데 단 하나뿐이었다고 했다"고 언급된 섬은 명백히 독도를 의미합니다. 이 짧은 구절은 조선 백성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하며 독도를 중요한 지리적 이정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며, 이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입니다.

안용복은 그저 표류인이 아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일본에게 직접 주장하고 확인받아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바다의 증언자였고, 독도가 실존하는 조선의 섬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명서였던 셈입니다. 비록 조선은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귀양 보냈지만, 동해는 그의 여정을 기억했고, 조선왕조 국가의 공식 기록은 그를 ‘동해의 좌표’로서 끝내 지우지 못했습니다.

이 한 줄의 기록은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독도 영유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가 됩니다. 이는 국가가 복잡한 외교적 딜레마 속에서 한 인물의 진실된 행동을 완전히 삭제할 수 없었던 역사적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역사가 끝이 아닌 순간에 새겨 넣은 작은 '반성문'이자, 한 영웅의 헌신과 그 존재감을 증명하는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한 방식입니다.

안용복은 그렇게, '사라진 사람'이 아닌 '남겨진 증거'로 우리 역사에 마지막 인사를 남겼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한 개인의 용기를 넘어, 우리 민족이 동해와 그 안의 섬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지켜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자, 오늘날 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는 근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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