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속 인물과 기록/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속안용복 #4] [1-4] 숙종 20년 2월 23일 | 사관(史官)의 논평: 울릉도-죽도 동일시 및 조선의 대응 비판

CurioCrateWitch 2025. 6. 1.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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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숙종 20년 2월 23일(1694년)
사관(史官)의 논평: 울릉도-죽도 동일시 및 조선의 대응 비판

📜 원문 발췌


【史臣曰: "倭人所謂竹島, 卽我國鬱陵島。 而鬱陵之稱, 見於羅ㆍ麗史乘及唐人文集, 則其來最遠矣。 島中多産竹, 亦有竹島之稱, 而其實一島二名也。 倭人隱鬱陵之名, 但以竹島漁採爲辭, 冀得我國回言, 許其禁斷然後, 仍執左契, 以爲占據之計。 我國覆書之必擧鬱陵者, 乃所以明其地之本爲我國也。 倭人之必欲改鬱陵二字, 而終不顯言竹島之爲鬱陵者, 蓋亦自病其曲之在己也。 噫! 祖宗疆土, 不可以與人, 則明辨痛斥, 使狡倭無復生心, 義理較然, 而過於周愼, 徒欲羇縻, 如犯人等科罪之語, 尤示弱於隣國, 可勝惜哉?"】

📚 번역

사관이 논평하였다. "왜인들이 이른바 죽도(竹島)라 부르는 섬은 곧 우리나라의 울릉도(鬱陵島)이다. 울릉도라는 명칭은 이미 신라와 고려의 역사서, 그리고 당나라 문인의 문집에도 보일 만큼 유래가 오래되었다. 섬 안에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죽도'라고도 불리지만, 실은 한 섬에 두 이름이 붙은 셈이다.

왜인들은 '울릉도'라는 이름을 감추고, 단지 '죽도에서 어로를 했다'는 식으로 말하며, 우리나라의 회답에서 어업 금지를 허락받은 뒤 그것을 빌미로 삼아 섬을 차지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가 답신에서 반드시 '울릉도'를 언급한 것은, 그 섬이 본래 우리나라 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왜인들이 굳이 '울릉'이라는 두 글자를 바꾸려 하면서도, 끝내 '죽도'가 곧 울릉도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주장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강토는 결코 남에게 넘길 수 없다. 그러므로 명확하게 따지고 통렬히 꾸짖어, 교활한 왜인들이 다시는 욕심을 품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도리와 이치에 맞는다. 그런데 지나치게 조심하고, 자국 백성들만 단속하려 하며, 범인을 다루듯 죄를 논한 말은 오히려 이웃 나라 앞에서 약한 태도를 보인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해설

이 사관 논평은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관은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竹島, 죽도)'가 바로 조선의 '울릉도'임을 명확히 밝히며, 이는 '한 섬에 두 이름'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이는 오늘날의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명칭 혼동을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울릉'이라는 명칭이 신라, 고려 시대 사서 및 당나라 문집에도 등장한다는 점에서 울릉도에 대한 조선의 역사적 영유권은 분명하고,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사관은 일본의 의도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 일본이 '울릉도'라는 이름을 감추고 '다케시마'를 내세우며, 조선으로부터 어업 금지를 받아낸 뒤 이를 빌미로 영유권을 주장하려 했다는 교활한 계략을 폭로하고 있다. 반면 조선이 답신에서 울릉도를 기어코 언급한 것은 그 섬이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자 한 의도였다고 분석한다. 일본이 '울릉도'이라는 이름을 피하면서도 '죽도'가 곧 울릉도임을 밝히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도 자신의 주장이 궁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사관은 조선 정부의 대응에는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외교적으로 지나치게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 그리고 자국 백성들에 대한 단속 중심의 대응은 오히려 일본에 약점을 보이는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는 울릉도 문제에 대한 사관의 강한 영토 의식과 더불어, 보다 적극적이고 단호한 외교적 대응을 주문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서 사관의 논평이 별도로 기록된 것은 이 문제가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중대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며, 그에 대한 대처가 부족했음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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