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속 안용복 #12] [2-7] 숙종 20년 8월 14일 | 울릉도 실태 조사와 향후 정책 결정

[2-7] 숙종 20년 8월 14일
울릉도 실태 조사와 향후 정책 결정
📜 원문 발췌
漢相以九月甲申, 乘舟而行, 十月庚子, 還至三陟, 言倭人往來固有迹, 而亦未嘗居之。 地狹多大木, 水宗 【海中水激處, 猶陸之有嶺也。】 亦不平, 艱於往來, 欲知土品, 種麰麥而歸。 明年復往, 可以驗之。 九萬入奏曰: "不可使民入居, 間一二年搜討爲宜。" 上從之。 又言: "禮曹所藏, 有丁卯伯耆州倭, 漁于其食邑竹島, 漂到我界之文, 東萊府所藏, 有光海甲寅, 倭有送使探視礒竹島之言。 朝廷不答, 使東萊峻斥之之文, 倭之漁採此島, 其亦久矣。" 上曰: "然, 時漢相所圖上山川道里, 與《輿地勝覽》所載多舛, 故或疑漢相所至, 非眞鬱陵島也。"
📚 번역
(삼척 첨사) 장한상(張漢相)은 9월 갑신일(甲申日)에 배를 타고 가서 10월 경자일(庚子日)에 삼척으로 돌아와 아뢰기를, "왜인들이 왕래한 자취는 확실히 있으나, 그곳에 거주한 적은 없습니다.
땅이 좁고 큰 나무가 많으며, 수종(水宗, 바다 가운데 물살이 세차 육지의 고개와 같은 곳) 또한 평탄하지 않아 왕래하기가 어렵습니다. 토산품을 알아 보고자 겉보리 씨앗을 심고 돌아왔습니다. 내년에 다시 가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백성들을 들어가 살게 해서는 안 되고, 1~2년에 한 번씩 점검하고 단속하는 수토(搜討)가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를 수용했다.
또 말하기를, "예조(禮曹)에 보관된 문서 중에 정묘년(丁卯年, 1627년) 호키슈(伯耆州, 백기주) 왜인이 그들의 식읍(食邑)인 죽도(竹島)에서 고기를 잡다가 우리나라 쪽으로 표류해 온 기록이 있고,
동래부(東萊府)에 보관된 문서 중에 광해군 갑인년(甲寅年, 1614년)에 왜인이 사신을 보내 이소다케시마(礒竹島)를 탐사(探査)하겠다는 말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답하지 않고 동래부로 하여금 엄히 꾸짖게 한 기록이 있으니, 왜인들이 이 섬에서 어로 행위를 한 것은 또한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지만 장한상이 그려 올린 산천과 길의 거리는 『여지승람』에 실린 내용과 다른 점이 많으니, 혹시 그가 다녀온 곳이 진짜 울릉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 이소타케시마(礒竹島): 바위가 많은 해안의 섬이라는 뜻으로, 울릉도를 지칭하기 위해 일본 측에서 사용한 명칭. ‘거칠고 외진 섬 죽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울릉도의 다른 이름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해설 | 조선이 울릉도에 보낸 시선, 그리고 수토(搜討)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
이 기록은 울릉도를 둘러싼 일본의 야욕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이, 실효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어떤 대응을 준비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장한상의 울릉도 실태 조사는 단순한 탐사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의 울릉도 정책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1. 험난한 지형 속에서도 실거주 가능성을 타진하다
울릉도에 파견된 장한상은 섬에 왜인이 드나든 흔적은 있으나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고합니다.
그는 지형이 워낙 험해 사람들이 상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면서도, 직접 겉보리(생장력이 강한 보리의 한 종류)를 심어 토질을 확인하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단순히 탐방 차원을 넘어서, 울릉도가 실제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우리 땅’인지 시험해 보려는 실질적인 관리 노력이었어요.
2. 이주보다 현실적인 선택, ‘수토(搜討) 정책’
장한상의 보고를 받은 조정 대신 남구만은 사람을 이주시켜 정착시키긴 어렵지만, 1~2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조사와 순찰을 나가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 제안은 단순한 일회성 탐사가 아니라, 울릉도를 주기적으로 직접 살피고(搜) 외부 세력을 몰아내는(討) 방식의 수토정책(搜討政策)으로 울릉도를 꾸준히 관리하자는 현실적인 방안이었습니다.
사실 수토정책 자체는 세종대에 이미 정비되어 사용되던 제도였어요. 하지만 그동안은 일정이 지켜지지 않거나 보고가 부실해 사실상 유명무실한 경우도 많았죠.
이번 숙종대의 결정은 기존의 수토정책을 울릉도에 본격 적용한 첫 사례로, 제도는 있었지만 잘 시행되지 못했던 정책이 드디어 실질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일본의 오랜 울릉도 접근 시도, 조선은 알고 있었다
남구만은 조정에 보고하면서, 일본 호키슈(伯耆州, 오늘날 일본 돗토리현) 왜인이 울릉도에서 어로 활동을 했던 기록을 언급합니다.
이는 일본이 오랜 세월 울릉도에 접근해 왔다는 사실을 조선이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물리적으로 막아 왔다는 역사적 근거를 함께 보여줍니다.
그가 사용한 “그들의 식읍(食邑, 봉토)”이라는 표현은 일본이 울릉도를 자기 땅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대목이에요.
4. 지도와 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주권 인식은 명확했다
흥미로운 건, 숙종이 장한상의 보고를 받고 나서 이렇게 말한 장면입니다.
“그렇긴 하나, 장한상이 그려 올린 산천과 길의 거리는 『여지승람』에 실린 내용과 다른 점이 많으니, 혹시 그가 다녀온 곳이 진짜 울릉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는 당시 조선이 울릉도에 대한 정확한 지리 정보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면서도,
임금이 직접 기록과 비교하며 지식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울릉도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주권 의식이 얼마나 뚜렷했는지를 보여줍니다.
💬 요약
울릉도 이주가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은 ‘비워두는 대신 정기적으로 직접 관리하는’ 수토정책(搜討政策, 섬이나 변방 지역을 살피고 외부 세력을 몰아내는 정책)을 통해 영유권을 실질적으로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큰 결단처럼 보이진 않지만, 바로 이런 현실적인 선택이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주권을 지켜낸 토대가 되었던 것이죠.
📌 공지 드려요
이전에 올린 [2-2]와 [별책부록 #2]에서는 숙종 때 울릉도 이주 정책이 실제로 실행된 것처럼 해설을 썼는데요,
이번 [2-7]을 정리하면서 다시 살펴보니 그때 논의는 정책이 아니라 '정책안' 제안 단계였고, 실제 실행으로 이어지진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두 글 모두 내용을 수정해서 다시 올렸습니다. 😅🙄😢😥😭
이미 읽으신 분들께는 혼란을 드려 죄송하고, 앞으로는 좀 더 꼼꼼히 확인해서 정확한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