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속 안용복 #14] [4] 숙종 22년 9월 2일 | 안용복 등 11인을 서울로 압송해 처벌토록 윤허하다

[4] 숙종 22년 9월 2일 | 안용복 일행의 심문 허가
📜 원문 발췌
以江原監司沈枰狀啓, 備邊司請安龍福等十一人, 拿致京獄, 明覈以處, 允之。
📚 번역
강원 감사 심평(沈枰)의 장계(狀啓, 보고서)를 근거로, 비변사(備邊司)는 안용복 등 11인을 서울의 감옥(京獄)으로 압송하여(拿致) 사실을 명확히 조사하고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고, 임금은 이를 윤허하였다.
🔍 해설 | 조선 정부는 '민간 외교 사건'을 어떻게 외교 사안으로 인식했는가
1696년(숙종 22년), 안용복 일행이 일본에서 송사를 벌이고 귀국한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외교 질서를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안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같은 해 9월 2일자 실록 기사입니다.
1. 지방에서 중앙으로, 민간 사건에서 외교 사안으로
강원 감사 심평(沈枰)의 보고에 따라 비변사(備邊司)는 안용복 등 11인을 서울의 감옥(京獄)으로 압송해 철저히 심문하고 처벌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숙종이 즉시 이를 윤허(允之)했다는 점은, 조선 조정이 이 사건을 단순한 월경(越境)이나 형사 문제로 보지 않고, 국가의 외교적 통제력을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외교 사안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줍니다.
비변사는 군사·외교 등 국가의 대외적 위기 대응을 총괄하던 최고 기구로, 사건이 이첩된 것 자체가 사건의 성격이 외교적 차원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2. “명확히 조사하고 처벌한다”는 의미
비변사는 안용복 일행에 대해 “명확히 조사하여 처벌하라(明覈以處)”고 요청했습니다. 이 표현은 다음의 두 가지 방향성을 내포합니다.
• 대내적 메시지: 조정은 민간인의 자의적인 외교 행위를 묵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며, 내부 질서와 외교 통제권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 대외적 메시지: 일본 측에는 “조선 정부는 이들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라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전달하려는 외교적 계산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쓰시마(對馬島)를 매개로 한 제한적 외교 통로를 엄격히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벗어난 행동은 곧 외교 마찰을 유발할 수 있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로 간주되었습니다.
3. ‘11인’이라는 집단성의 강조
실록에는 ‘안용복 등 11인’이라는 표현이 명시되어 있으며, 이는 이들이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동래, 흥해, 영해, 평산포, 낙안, 순천, 연안 등 전국의 연해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민간인들로, 각지의 해안권 백성들이 일본 측의 울릉도 침탈에 집단적 대응을 시도한 것입니다.
일부는 어부였거나 해양 수공업자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순천 출신 다섯 명은 승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 평산포 출신 이인성은 일본 측 관청에 제출할 문서를 직접 작성한 인물로, 문식 계층이었거나 양반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어선의 주인이나 투자자와 같은 해양 경제의 중심 인물들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으며, 단순한 표류민으로 보기 어려운 ‘자각 있는 집단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임금의 윤허와 국가적 대응
해당 기사는 숙종이 비변사의 요청을 즉시 윤허(允之)했다는 표현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국왕이 이 사건을 단순한 지역 소요가 아닌, 국가 정무로서 직접 개입이 필요한 외교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에서 국왕이 직접 명을 내려 비변사와 형조의 공동 심문을 지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사건의 중요성과 파장을 고려한 조치였습니다.
이러한 대응은 이후 안용복만을 별도로 처벌하고, 나머지 동행자들은 무마하는 방식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조정의 정치적 선택과 외교 전략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 요약 정리
1. 안용복 사건은 단순한 민간인의 월경이 아니라, 조선의 국경과 외교 질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외교 사건으로 인식되었습니다.
2. 비변사의 요청과 숙종의 윤허는 조선 조정의 전략적 대응이자, 외교적 파장 차단을 위한 의도된 조치였습니다.
3. '11인'이라는 표현은 전국 연해 지역 출신의 민간인들이 집단적으로 결집한 민간 사절단임을 보여줍니다.
4. 조선 조정은 외교적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책임 있는 선별적 처벌이라는 방식으로 사건을 수습하고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