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속 안용복 #16] [6-1] 숙종 22년 9월 25일 (1696년) - 비변사에서 안용복 등을 추문하다

[6-1] 숙종 22년 9월 25일 (1696년) - 비변사에서 안용복 등을 추문하다
📜 원문
備邊司推問安龍福等。
龍福以爲: "渠本居東萊, 爲省母至蔚山, 適逢僧雷憲等, 備說頃年往來鬱陵島事, 且言本島海物之豐富, 雷憲等心利之。
遂同乘船, 與寧海篙工劉日夫等, 俱發到本島, 主山三峰, 高於三角, 自南至北, 爲二日程, 自東至西亦然。
山多雜木、鷹、烏、猫, 倭船亦多來泊, 船人皆恐。
渠倡言: ‘鬱島本我境, 倭人何敢越境侵犯? 汝等可共縛之。’ 仍進船頭大喝, 倭言: ‘吾等本住松島, 偶因漁採出來。 今當還往本所。’ 松島卽子山島, 此亦我國地, 汝敢住此耶?’ 遂以翌曉, 拕舟入子山島, 倭等方列釜鬻煮魚膏。
渠以杖撞破, 大言叱之, 倭等收聚載船, 擧帆回去, 渠仍乘船追趁, 猝遇狂飆, 漂到玉岐島。
📚 번역
비변사에서 안용복 등을 심문하였습니다.
안용복이 진술하였습니다.
“저는 본래 동래에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뵙기 위해 울산에 들렀다가 우연히 승려 뇌헌(雷憲) 등을 만났습니다. 뇌헌에게 제가 지난해 울릉도를 다녀온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고, 그 섬에 해산물이 매우 풍부하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그러자 뇌헌 일행이 마음속으로 이익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배를 타고, 영해(寧海)의 사공 유일부(劉日夫) 등과 더불어 울릉도로 향했고,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울릉도의 주산(主山)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이는 삼각산(三角山, 오늘날 북한산)보다도 높아 보였습니다.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 걸리는 거리였고, 동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산에는 잡목이 우거지고, 매와 까마귀, 고양이 등이 많았으며, 일본 배들도 많이 정박해 있어서 뱃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먼저 나서서 말했습니다. ‘울릉도는 본래 우리 땅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가? 자, 너희들도 함께 저들을 묶어라.’ 그리고는 뱃머리로 나아가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왜인들이 말하길, ‘우리는 본래 송도(松島)에 살던 자들인데, 고기잡이를 하러 우연히 나온 것입니다. 이제 본래 거처로 돌아가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송도는 곧 자산도(子山島, 독도)다. 이곳 또한 우리나라 영토인데, 감히 이곳에 살겠다는 말인가?’
이튿날 새벽, 저는 배를 몰고 자산도로 들어갔습니다. 왜인들은 가마솥을 늘어놓고 생선기름을 끓이고 있었는데, 저는 지팡이로 그 가마를 부수며 큰소리로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왜인들은 끓이던 물건들을 거두어 배에 싣고, 돛을 올려 돌아갔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그들을 뒤쫓던 중 갑작스러운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오키섬(玉岐島, 옥기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해설 | 안용복의 진술로 본 '민간 외교'의 현장과 영토 의식: 경제적 동기와 영토 수호의 복합성
이 실록 기사는 비변사 신문 과정에서 안용복이 직접 진술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경험담을 넘어서, 조선 민간인이 울릉도와 독도(자산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이를 수호하려 했던 '민간 외교'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史料) 입니다. 특히, 울릉도 도해의 경제적 동기가 어떻게 영토 수호 의지와 결합하여 사건을 전개시켰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1. 울릉도 도일의 복합적 동기와 집단의 결성
안용복의 진술에 따르면, 울릉도의 풍부한 해산물에 대한 기대, 즉 '뇌헌 등이 마음속으로 이익을 취하고자 했다'는 경제적 동기가 울릉도 도해의 중요한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어민과 승려(사찰 운영을 위해 경제 활동을 하기도 했음)들의 현실적인 생계 및 경제 활동의 맥락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이익 추구만으로 이들의 울릉도 도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수익을 노린 것이었다면 개인적으로 다녀올 수도 있었을 텐데,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 겅원도 뿐 아니라 황해도에서까지 전국 연해 지역에서 모인 11 명이 함께 행동했습니다.
안용복은 왜인에게 “울릉도는 본래 우리 땅이다”라고 강하게 주장하며, 영토 수호 의식을 분명히 행동으로 드러냈습니다.
즉, 이들의 도해에는 경제적 동기와 더불어 조선 영토에 대한 자각과 방어 의지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2. 안용복의 주도적 행동과 독도 인식
울릉도에 왜선이 다수 정박하자, 조선의 뱃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안용복은 앞장서 "울릉도는 본래 우리 땅"이라며 왜인을 꾸짖고, 함께 묶으라 지시했다.
이는 단지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민간인이 일본인에게 영토 침범을 경고한 공식적 대응 행위였다.
특히 왜인이 말한 ‘송도’에 대해, 안용복은 곧바로 ‘자산도(독도)’라고 응수하며, "이곳도 우리나라 땅인데 감히 여기에 거주하느냐"고 되묻는다.
이는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 대응이었고, 훗날 조선 조정이 독도 영유권의 핵심 논거로 삼게 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3. 독도(자산도)에서의 물리적 제압의 상징성
안용복은 자산도에 들어가 어유를 끓이던 왜인의 가마솥을 지팡이로 깨고 그들을 꾸짖었다.
이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조선 영토 내에서의 외국인의 불법 경제 활동을 물리적으로 제지한 행위였으며, 동시에 조선의 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려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 조정이 공도정책에 따라 울릉도를 방치하던 와중에, 민간 차원에서 벌어진 전례 없는 영토 수호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4. 옥기주(오키 제도)로의 표류와 ‘민간 외교’의 출발점
안용복은 왜선을 추격하던 중 광풍을 만나 오키시미(玉岐島 옥기도)로 표류하게 되었다. 이는 계획된 입국이 아닌 우발적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 본토에 도착하여 울릉도·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게 되는 ‘비공식 민간 외교’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안용복 사건은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니라, 우발성과 의지가 결합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민간인의 직접적인 외교적 언행은 조선 정부의 제한된 외교 정책과 대비되며, 국가 주권의 실질적 수호를 위한 중요한 상징으로 재평가될 수 있다.
📌 추가 요약 논점
• 민간 차원의 ‘자각 있는 집단 행동’이 영토 수호와 결합된 사례.
• 독도(자산도)를 조선 영토로 명확히 인식하고 왜인의 불법 행위를 제지한 상징적 장면.
• ‘옥기주로의 표류’는 안용복이 원한 바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민간 외교의 물꼬를 트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