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속 안용복 #17] [6-2] 숙종 22년 9월 25일 비변사에서 안용복 등을 추문하다
[6-2] 숙종 22년 9월 25일 (1696년)
비변사에서 안용복 등을 추문하다
📜 원문
島主問入來之故, 渠言: ‘頃年吾入來此處, 以鬱陵、子山等島, 定以朝鮮地界, 至有關白書契, 而本國不有定式, 今又侵犯我境, 是何道理?’ 云爾, 則謂當轉報伯耆州, 而久不聞消息。 渠不勝憤惋, 乘船直向伯耆州, 假稱鬱陵、子山兩島監稅, 將使人通告本島, 送人馬迎之。 渠服靑帖裏, 着黑布笠, 穿皮鞋乘轎, 諸人竝乘馬, 進往本州。 渠與島主, 對坐廳上, 諸人竝下坐中階, 島主問: ‘何以入來?’ 答曰: ‘前日以兩島事, 受出書契, 不啻明白, 而對馬島主奪取書契, 中間僞造, 數遣差倭, 非法橫侵, 吾將上疏關白, 歷陳罪狀。’ 島主許之。
📚 번역
안용복이 오키시마(玉岐島, 옥기도)¹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도주(島主)²가 들어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이렇게 답했다.
“지난해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확정한 관백(關白)³의 문서(書契)까지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우리 바다와 섬을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도주는 이 말을 듣고 “호키슈(伯耆州, 백기주; 지금의 돗토리현)에 보고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이에 안용복은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배를 타고 백기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울릉도와 자산도의 감세(監稅, 세금을 감독·징수하는 직책)라고 속이고, 일본 측에 사람과 말을 보내 자신을 접대하도록 통고했다.⁴
청색 겉옷(帖裏)을 입고 검은 베 삿갓을 쓴 채 가죽신을 신고 가마를 탔으며, 동행자들은 모두 말을 타고 본주(本州, 백기주 중심지)로 향했다.
도주와는 대청 위에 마주 앉았고, 다른 일행은 중단에 앉았다.
도주가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묻자 안용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난번 두 섬(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로 분명히 문서를 받았는데, 쓰시마섬(對馬島, 대마도)의 번주(藩主, 지역 영주)가 그 문서를 빼앗고 위조하여, 수차례 왜인을 보내 무단으로 드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관백께 상소를 올려 이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려 합니다.”
이에 도주는 그 뜻을 받아들였다.
(1. 오키시마(玉岐島, 옥기도): 여기서 ‘오키시마’는 오늘날 일본에서 부르는 오키 제도(隠岐諸島), 즉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중 하나의 섬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당시 조선 기록에는 섬 전체를 ‘오키시마’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오키제도(隠岐諸島) 중 한 섬에 해당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2. '도주(島主): 작은 섬 지역의 지배자를 의미하는데, 중앙 권력과 직접 연결된 '번주(藩主, 다이묘)'보다 낮은 계급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과 외교 창구였던 쓰시마의 지배자는 '번주'였고, 오키시마는 '도주'가 다스렸습니다.)
(3. 관백(關白): 일본 고대부터 존재하던 고위 정치 직책으로, 천황을 보좌하며 정무를 총괄하는 섭정 또는 정무총괄직.
그러나 에도 시대(안용복 당시)에는 이미 실질적인 최고 권력은 막부(將軍)에게 넘어가 있었고, 관백은 형식적인 권위만을 가진 존재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문서나 상소에서는 여전히 일본 중앙 권력의 대표자 또는 국가적 위상을 상징하는 명칭으로 '관백'을 지칭하곤 했습니다.)
(4. 외교사절단은 일반적으로 사전통보와 양국 간의 절차에 따라 공식적인 영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안용복은 민간인이었음에도 가마와 복장을 갖추고, 울릉도·자산도의 감세를 자처하며
영접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관례를 넘나드는 대담한 연출로, 자신을 조선 정부의 공식 사절처럼 보이게 하여
일본 측으로 하여금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만든 전략적 행동이었습니다.)
🔍 해설 | 안용복, 외교 전면에 나선 민간 사절 — 협상가의 전략과 연출
이 실록 기사는 단순한 표류민이었던 안용복이, 일본 본토에 상륙한 뒤 어떻게 '비공식 사절'로 탈바꿈하여 협상을 주도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 표류에서 외교 항의로의 전환 — 민간인의 기개
오키 제도에서 당한 냉대와 침묵 속에서 안용복은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나서서 조선의 영토 침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일본 본토인 백기주로 향한 것입니다.
이는 ‘표류민의 귀환’이라는 상황을, 조선 민간인의 자발적인 외교 항의로 전환한 역사적 전기였고, “울릉도와 자산도는 조선 땅”이라는 명확한 주장과 함께 침범에 대한 도의적, 외교적 책임 추궁으로 이어졌습니다.
2. '감세장' 사칭 — 전략적 연출과 협상술
안용복은 자신을 울릉도·자산도의 감세(監稅)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는 실제 관직이 아닌 자칭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높여 일본 관청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연출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격식 있는 복장과 행렬을 준비하여, 조선 정부의 사절처럼 보이도록 연출했습니다. 이 장면은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만반의 계획과 준비를 갖춘 행위였으며 일본 측에 공식성·위엄·결단력을 전달하는 동시에, 민간인의 방문임에도 결코 가볍게 보지 말라는 비언어적 메시지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외교 상대를 바꾼 안용복 — 쓰시마 번주에서 관백으로
이 사건의 핵심은 안용복이 일본 지방 관료나 쓰시마 번주가 아닌, 일본의 중앙 권력인 '관백'에게 직접 상소하겠다고 공언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외교 전략을 담고 있습니다:
1) 쓰시마한(對馬藩, 대마번)의 행위를 일본 정부 전체의 문제로 격상시키려는 시도
2) 일본 내 권력 구조의 ‘상위 책임자’를 직접 겨냥함으로써 사안의 심각성을 부각
3) 조선의 입장을 보다 엄중하게 전달하려는 심리전과 명분 확보
📌 핵심 논점 정리
1) 안용복은 단순한 표류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민간 외교 주체자였으녀 혼자가 아니라 전국 연안에서 모인 11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2) 감세장이라는 ‘가짜 관직’은 대담하지만 전략적으로 효과적인 선택이었습니다.
3) 울릉도와 자산도(독도)의 조선 영토 인식은 명확했고, 반복되는 침범에 대해 외교적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4) 관백에게 상소를 예고함으로써 외교 이슈를 중앙 정치 무대로 끌어올리려 했습니다.
4) 이 모든 행보는 조선 민간인의 외교적 자각과 실천이라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역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조선 정부의 문서가 닿지 못한 곳에서, 안용복은 전국 각지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의 뜻을 전하며 외교 전면에 나선 이례적인 민간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