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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별책부록 #5] 왜 조선 조정은 안용복 선생의 감형에 반발했는가? ― 국가가 영웅을 버리는 방식 ―

by CurioCrateWitch 2025.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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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 조정은 안용복 선생의 감형에 반발했는가?
― 국가가 영웅을 버리는 방식 ―

숙종이 분명히 감형을 결정했고, '불허(不允)'와 '물번(勿煩)'까지 내렸는데도, 조선 조정 대신들은 며칠을 두고 집요하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형량 문제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안용복 선생의 존재 자체가 조선의 통치 이념과 외교 질서를 흔드는 불편한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인정하는 순간, 조선의 권위와 체제 전반의 허상이 무너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정은 그의 성과보다 '절차 위반'만을 부각하며 더 강한 처벌을 요구했던 것이죠.


1. 외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의 투사

안용복 선생의 일본행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자주 외교의 상징이지만, 조선 조정의 눈에는 '공식 외교 경로'를 무시한 민간인의 돌출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이룬 결과가 너무 컸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조정의 무대응과 무능을 드러내는 반사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대응을 유지해왔는데, 안용복이라는 개인이 이러한 경계를 넘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자, 이는 조정의 외교적 역량 부족을 부각시켰습니다. 결국 조선 조정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사람을  오히려 벌하려 했던 것입니다.


2. 체제 위협으로 작동한 '올바른 행동'

안용복 선생의 행동은 성리학적 절차주의 관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위반'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외교는 정해진 '통신사(通信使)'와 '왜관(倭館)'을 통한 경로를 엄격히 준수했습니다. 민간인이 국왕의 명령 없이 타국에 넘어가 외교적 교섭을 벌이는 것은 국가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위반' 덕분에 독도와 울릉도의 영유권이 일본 막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체제가 흔들릴까 두려워, 행동의 정당성보다 형식 위반을 문제 삼는 방식으로 그를 억누른 것입니다. 내용보다 형식, 성과보다 절차가 우선된 비극적 선택이었으며, 이는 조선 사회의 경직된 통치 이념과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3. 외교 무능을 덮기 위한 희생양 만들기

안용복이 일본 막부로부터 조선 영토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조선 조정이 오랫동안 회피해온 직접 외교의 가능성을 민간인이 실현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곧 조선의 외교 무능을 폭로한 셈이었고, 그 불편한 진실을 덮기 위해 조정은 그의 절차 위반을 과도하게 문제 삼고, 공로를 과장했다며 왜곡하고, 마침내 '희생양'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안용복을 처벌함으로써, 조선 조정은 자신들의 무능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고, 체제 유지를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것입니다.


4. '정치'의 도구가 된 안용복

더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에 있습니다. 왕권과 신권이 팽팽히 맞서던 시기, 안용복이라는 존재는 정파 간 권력 싸움 속에서 정략화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처벌을 두고 벌어진 논쟁은 단순히 법적 문제만이 아니라, 감형을 결정한 숙종의 왕권을 견제하려는 신하들의 의도, 또는 독도 문제에 대한 외교 실패의 책임을 상대 정파나 특정 인물에게 떠넘기려는 정파적 목적 속에서 이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안용복은 그의 실제 공로나 행위의 의미보다는 '정치적 명분'만 부각된 존재로 이용당했던 것입니다.


🔚 결론 | 조선은 성과보다 ‘방식’을 문제 삼았다

안용복 선생의 공로는, 조선이라는 체제 안에서 환영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과는 탁월했지만, 방식이 틀렸다"는 이유로 조정에 의해 배척되고, 억눌리고, 지워졌습니다. 조선은 그를 인정하는 순간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해야 했고, 그 두려움 속에서 그를 죽이진 않았지만 철저히 눌러버렸던 것입니다.


국가는 때로 영웅을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지킨다. 안용복은 그 가장 슬픈 사례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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