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도는 우리 땅/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마지막 이야기 – 이용당한 영웅, 외면당한 진실

by CurioCrateWitch 2025. 5. 30.
반응형
SMALL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마지막 이야기
– 이용당한 영웅, 외면당한 진실

조선은 안용복 선생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필요 없을 때는 처벌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이 바다는 우리가 지켜야 할 바다요"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그에게 조선은 곧바로 곤장 100대를 내렸습니다.

그는 정말 혼자였을까요? 조정은 그의 행적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요?


🧭 조선은 정말 몰랐을까? 그리고 누가 그를 보냈을까?

"왕의 밀명이 있었던 걸까, 조선 조정 차원이었나, 전라도 수군의 판단이었나?"

사료를 면밀히 살펴보면, 조선 조정은 '공식적으로는 몰랐던 척' 했지만, 실제로는 안용복의 활동을 알고 있었고, 필요할 때는 묵인하며 활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용복 선생을 공식적으로 일본에 파견한 주체는 사료 속에 보이지 않습니다. 즉, 사료를 통해 왕의 밀사나 조정의 공식 명령으로 파견된 것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여러 세력의 묵인과 비공식적인 지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 1696년 2차 도일 당시 정황

전라좌수영 소속 의승수군과 동행:

안용복은 개인이 아닌, 조직적인 군사력의 일부인 의승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이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준비가 아니었으며, 지역 군영의 묵인 또는 비공식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전라좌수영은 울릉도와 독도 문제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최전선의 군사 조직이었으므로, 독자적인 판단 하에 안용복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복, 호패, 깃발, 문서 등 갖춤:

이는 개인이 즉흥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관의 허가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준비였습니다.

● 왜관(부산 외교 창구) 관리들의 협조 정황:

대일 외교의 최전선인 왜관 관리들이 그의 도일을 직간접적으로 도왔다는 정황도 존재하는데, 이는 조정의 외교 라인 내 일부 인사가 안용복의 활동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정황들은 안용복의 도일이 개인적인 모험이 아닌, 누군가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반공식 사절단의 성격을 띠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우리는 보낸 적 없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했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 체제 아래 있었고, 일본과의 외교 또한 철저히 기존의 규칙과 절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안용복과 같은 민간인이 자의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영토 문제를 논하는 것은 기존의 외교 질서를 깨뜨리는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안용복은 다시 심문을 받고 처벌당했습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나라가 그의 공은 가져가되, 책임은 지지 않는 외교 전략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 이 진실을 밝혀낸 연구서들

안용복 선생의 진정한 의미와 그 배경에 숨겨진 조정의 속내를 밝혀낸 중요한 연구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의 밀사 안용복』 – 최영성 저:

안용복의 도일 준비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부 차원의 묵시적 개입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조정의 이중적 태도와 그 전략적 활용을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안용복의 울릉도 도해 및 도일 경로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이상균·안동립 공저:

2차 도일 경로와 동행한 의승수군의 정체를 통해 안용복의 비공식 외교사절로서의 실체를 추적하며, 그의 활동이 단순한 월경 행위가 아니었음을 논증합니다.

『고대 중세 근세시대의 한·일 양국의 독도 인식』 – 조순 저:

안용복의 활동이 조선의 독도 영유 논리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분석하고, 공식적인 인정은 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성과를 활용한 조정의 이중적인 전략을 드러냅니다.


📌 결론: ‘간첩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채’ 버려진 존재

안용복 선생은 조선의 민간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앞서 나라의 땅을 지키기 위해 몸소 나섰습니다. 그는 조정의 이중적 외교 전략 안에서 필요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결국 그는 공적인 기록 속에서조차 '논쟁의 인물'로 남았고,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안용복 선생의 비극적인 서사는 국가의 이익이라는 명목 아래 개인의 희생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픈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하지만 그의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활동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한 중요한 증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독도 수호의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 다음 연재 예고
《조선왕조실록 속 안용복》
– 실록은 그의 이름을 어떻게 남겼을까?
다음 연재에서 다시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겠습니다.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