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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역사서 속 안용복

[역사서 속 안용복 2] — 안용복 피랍 사건의 전말, 실록으로 보다

by CurioCrateWitch 2025.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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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서 속 안용복’ 시리즈 2탄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1693년(숙종 19년), 일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돗토리번으로 끌려간 안용복 선생님의 첫 실록 기록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 일본 에도시대의 지방 행정 단위로, 우리나라의 ‘도(道)’ 정도의 크기에 해당함)


그날 바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 『숙종실록』 숙종 19년 9월 25일 기사 원문 발췌

▪︎  傳曰: "按慶尙監司鄭齊斗咨, 有人告云, 東萊安龍福等, 被倭人掠至對馬。"

翌日, 傳曰: "倭人掠人, 豈有是理? 該司嚴加詰問, 仍移文於對馬。"



(해석) 전교하기를: “경상 감사 정제두의 보고에 따르면, 동래 사람 안용복 등이 일본인에게 납치되어 대마(對馬)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다음 날, 다시 전교하기를: “왜인이 사람을 납치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해당 관청은 철저히 조사하고, 대마번에도 공문을 보내라.”





🔍 해설 및 의미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편)안용복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정식 문서로 ‘피랍’ 사실이 보고되었고,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공식 외교 문서(이문)를 대마번에 발송하라고 지시합니다.


즉, 단순한 어부 납치 사건이 아니라, 국경 문제로 격상된 외교 분쟁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 역사적 배경과 맥락

1693년, 울릉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안용복 선생님은 일본 어부와의 충돌 끝에 피랍되어 돗토리번(鳥取藩)으로 끌려갑니다. 이는 당시 일본 측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 어장처럼 인식하고 있었던 정황을 보여주며, 그에 대한 조선의 강한 외교적 대응이 기록된 첫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훗날 안용복 선생님의 자발적인 외교 활동과 두 번째 일본 방문(숙종 22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마무리하며

숙종실록』은 이렇게 단 두 줄의 짧은 기사로 시작해, 이후 안용복 선생님의 이름을 세 차례나 실록에 기록하게 됩니다.

이번 사건은 민간 어부의 억울한 피해이자, 조선과 일본이 울릉도·독도를 두고 명시적으로 외교 대응을 시작한 최초 사례 중 하나로 역사에 남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숙종 22년, 안용복 선생님이 다시 일본을 찾고 ‘수도관(守島官)’이라 자칭하며 울릉도와 독도 수호 의지를 드러낸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참고자료

▪︎ 『조선왕조실록』 숙종 19년 9월 25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 『독도 자료총서』 (독도연구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CurioCrateW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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