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

🚀 한·중 수교 직전, 한 달간 100만원으로 다녀 온 중국 여행기 — 중국인 용변 테러의 유래, 산둥성에서 만난 북한인들, 호텔 전화기 감청

CurioCrateWitch 2025. 11. 2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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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 수교 직전, 한 달간 100만원으로 다녀 온 중국 여행기 — 중국인 용변 테러의 유래, 산둥성에서 만난 북한인들, 호텔 전화기 감청, 5개국어를 하던 만 6세 케냐 꼬마

 '무식하니까 용감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이전인 그 해 6월에 단돈 100만 원으로 중국 대륙을 한 달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홍콩(香港), 선전(深圳), 광저우(广州), 상하이(上海), 칭다오(青岛), 항저우(杭州), 쑤저우(苏州), 옌타이(烟台), 웨이하이(威海), 베이징(北京), 샤먼(厦门)  등 발 닿는 대로 여러 도시를 둘러 봤습니다. 
 
이제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그리고 언젠가는 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 특별했던 시간의 기록을 한 번 남겨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당시 중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어 기록에 남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찬찬히 기억을 떠올려 적어봅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납치와 장기매매가 난무하는 세상이라 너무 위험해서 따라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군복무까지 마친 저희 아들에게도 홀로 떠나는 여행을 만류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홍콩 왕복 항공권 40만 원을 포함해 총 100만 원, 즉 중국 현지에서는 단돈 60만 원으로 1달간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물가가 지금과 같지 않게 무척 저렴했던 데다가 외국인에게  내국인의 3배 가격을 받는 대중교통과 입장료 등 여러 곳에서 중국인인 척 하고 중국인 가격으로 다니고, 숙식비용을 최대한 아껴서 그 비용으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중국인 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었던 건 여행 중 만난 중국인들이 제 대신 표를 사주기도 하고 그걸 어깨너머로 보다가 스스로 중국인 줄에 서서 표를 사기도 하곤 했습니다. 식사는 길거리에서 500~1000원이면 볶음밥 등 한끼 식사가 가능했고, 가끔 사람들과 어울려 고급식당에 가서 먹기도 했습니다. 숙소 또한 저렴한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 1. 당시 중국여행은 반드시 홍콩을 통해서

당시 한국인의 중국 여행은 직접적인 경로가 부재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홍콩을 경유해서 비자를 발급받는 우회적인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저도 먼저 홍콩으로 향했습니다. 홍콩 여행사에서 중국 여행 비자를 발급받았고, 이 비자는 A4 용지로 출력해서 여권에 호치키스로 찍혀 나왔습니다. 
 
도착한 날 빗속을 뚫고 홍콩의 작은 여행사에서 비자를 받았는데, 그날 갑자기 정강이까지 차올랐다가 잠시 후에 감쪽같이 물이 쫙 빠지는 열대성 폭우를 만났습니다. 홍콩에 막 도착했는데 어떤 사람이 저에게  " 你去过香港吗 ? (홍콩에 가 본 적이 있나요?)"라고 질문을 해서 무슨 질문인지 어리둥절했는데 홍콩 내에서 홍콩이라고 하면 홍콩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질문한 그 사람을 따라서 홍콩섬에도 가 봤습니다. 배를 타고 간 게 아니라 해저 도로로 차를 타고 갔습니다.
 

1992년 비가 오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홍콩 거리


홍콩은 어느 식당에서든 자스민 차를 음료로 내주었습니다. 꽃향이 가득한 그 향을 못 잊어 지금도 자스민 차를 즐기곤 합니다. 한 번은 홍콩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유명한 딤섬 전문 식당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먹은 딤섬만큼 맛있는 딤섬을 아직 못 찾았습니다. 

 

홍콩에서 비자를 소지한 후에는 홍콩과 인접한 선전(深圳)을 육로로 통과하며 비로소 중국 본토에 발을 디뎠습니다. 귀국 역시 홍콩을 경유하는 동일한 경로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 2. 대륙의 낭만과 현실: 기차와 숙소에서 만난 풍경

중국 내에서는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서 다녔습니다. 중국 대륙을 혈관처럼 이어주는 기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의 공간이었습니다. 중국 대륙이 넓으니만큼 快车(빠른 열차)라 할지라도 보통 24시간 걸리는 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차 안에서 먹고 자는 생활이 이루어졌고, 이동하며 숙박비용도 저절로 해결되었습니다. 낮에는 잉워(硬臥, 딱딱한 침대칸), 루완워(軟臥, 부드러운 침대칸) 할 것 없이 낮이면 사람들은 다 같이 아래 침대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기차 안에 조용한 곳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저는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27시간, 상하이에서 옌타이까지 24시간, 상하이에서 광저우까지 37시간이 걸리는 장시간의 여행을 했는데 그 기차 안에서 저는 다양한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투리 때문에 의사소통이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중국의 사투리는 우리나라의 사투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제주도 말을 못 알아듣는 것,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아래 비교 도표 참고) 그래서 필담으로 소통하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번체자로 중국어를 먼저 배우고 간체자를 나중에 익힌 저는 간혹 간체자가 생각이 안 나서 번체자로 필담을 나누면 중국인들이 제게 유식하다며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에게 번체자는 그런 위치인 것 같습니다. 
 

🔢 참고 1. 중국의 표준어와 사투리 숫자 (1부터 10까지) 비교

숫자한자표준 중국어 (북경어)광둥어 (Cantonese)상해어 (Shanghainese, 吳語)

 

🗣️ 참고 2. 중국의 표준어와 사투리 기본 회화 표현 비교

 

표현한자표준 중국어 (북경어)광둥어 (Cantonese)상해어 (Shanghainese, 吳語)

 
밤에는 주로 기차에서 이동하며 잠을 자거나 뚜어런팡(多人房)이라는 저렴한 숙소를 2~3000원에 이용했습니다. 특히 기차역사 안에는 24시간 오가는 기차 승객들을 위한 독특한 숙소가 있었습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침대들이 나열된 광활한 공간에 침대 하나씩 빌려주는 숙소였는데 하룻밤에 1천 원, 2천 원 하는 아주 반가운 가격이었습니다. 가끔 샤워도 하고 혼자 푹 쉬고 싶을 때에는 호텔의 솽런팡(雙人房, 트윈룸)에서 침대 하나를 사용하고 다른 침대를  부빠오(不包,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오픈해 놓는 것)하고 1만원대에 체크인 했습니다. 대부분은 운이 좋게도 옆 침대에 다른 사람이 체크인 하지 않아서 절반 가격에 방 전체를 사용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단 한 번을 빼놓고요... 

🤣 '한궈 샤오지예(韩国小姐,한국 아가씨)' 에피소드

그 단 한번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제 기억에 각인되었습니다. 그 날은 제가 잠든 사이 옆 침대에 다른 손님이 들어왔는데, 다음날 아침 그 손님의 손님들이 이른 아침부터(오전 8시쯤) 방문해서 방에서 비즈니스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잠결에 두런두런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민망해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그 사람들이 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여자들의 목소리만 들린 게 아니라 남자들의 목소리도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로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날 무렵 그들이  ' 한궈 샤오지예(韩国小姐,한국 아가씨) '라며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제 여행 책자와 중국어 사전과 화장품 등을 거론하며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6월에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잔다는 건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은 그들이 나가기를 기다린다는 필사적인 바디랭귀지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못 견디고 제가 침대에서 뛰쳐나와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는데, 씻고 나와 " 你们好!(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그들이 환하게 웃으며 필자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 본토에서는 저 같이 자유여행을 하는 한국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신기해 하고 호기심을 느끼며 모두 친절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 내내 저는 중국인들을 구경하고 그들은 저를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대리석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던 그때의 기억으로는 공산당은 무섭지만, 공산당 아래 민초들은 대단히 복종적이고 순종적이어서 순수한 면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와 만나 괴물이 되었지만 그 당시 저는 정말 중국 여행 내내 안전했고, 중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


🤫 3. 문화 충격과 사회의 그림자

그 시절 중국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와 만나 지금처럼 ‘괴물’이 되기 전이라, 보이스피싱이나 납치, 장기매매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들이 만연하지 않아 상당히 안전한 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안전하다고 해서 문화적 충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행 내내 흥미롭고 때로는 믿기 어려운 장면들을 여러 번 마주했습니다.
 
먼저, 기차 안의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강렬합니다. 사람들은 해바라기씨와 피딴(皮蛋, 오리알을 발효시켜 만든 음식)을 까먹고, 그 껍질을 기차 바닥이나 창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버렸습니다. 청소원들이 정해진 시간마다 바닥을 쓸고 지나가긴 했지만 잠깐뿐이었고, 기차 안을 돌아다니면 내내 해바라기씨 껍질과 피딴 껍질, 휴지들을 밟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호텔에서 국제전화를 사용했을 때는 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통화 내내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다 갑자기 ‘뚝’ 하고 멈추는 순간 전화도 함께 끊겼습니다. 이후 한참 동안 전화기가 먹통이었는데, 30분이 지나도 통화가 안 되어서 밖에 나가 식사를 하고 다시 들어와 보니 그제야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녹음 테이프를 갈아 끼우는 시간이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중국 공산당의 감청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웨이하이(威海)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충격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글 간판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운 마음에 가게로 달려 들어가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그곳에 있던 너댓 명의 사람들은 제 인사를 듣고도 아무 말 없이 안쪽으로 더 들어가 서로만 바라보며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혼자 여행 중이고 중국말만 하다가 한국어를 하는 사람을 만나 반가웠다고 말했지만, 끝내 그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침묵 끝에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하고 나왔는데, 나중에 다른 중국인에게 듣고서야 그들이 북한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엄격한 지령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위험성을 고려하면, 지금 돌이켜보아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항저우(杭州)의 큰 호수공원에서는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며 스킨쉽을 하는 장면도 보았고, 쑤저우(苏州)의 어느 더러워 보이는 하천에서는 남자들이 목욕하는 건지 땀을 식히는 건지 웃통 벗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웃통 벗고 다니는 모습은 물 위에서도 종종 봤습니다. ㅎㅎ~


🚽 4. 문화 충격의 정점: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용변 보는 공공 화장실 – 길거리 용변테러의 시민의식

당시 중국의 공중화장실은 좌식 형태였는데, 칸막이가 낮아서 앉으면 어깨 위부터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용변을 볼 때에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앞에 있는 사람 및 옆 칸에 앉은 사람과 서로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된 칸막이와 문이 갖춰진 화장실은 호텔이나 고급 식당에서나 겨우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화장실 문화는 공산주의 혁명 이후 자리 잡은 생활 방식과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비밀을 최소한으로 하려는 사상에 집단의 효율성, 경제성, 그리고 감시의 의도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공공시설 전반에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곳은 샤먼 국제공항이었습니다. 국제공항임에도 칸막이는 낮고 문은 아예 없어 도저히 이용할 수 없었고, 결국 비행기 탑승까지 몇 시간을 참은 끝에 기내 화장실에서야 겨우 볼일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프라이버시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 공공 용변 문화는 중국인들에게 자연스러운 관념으로 자리 잡았고, 훗날 일부 중국인들이 해외에서 공공장소나 길거리에서 용변을 보는 이른바 ‘길거리 용변 테러’로 이어진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받지 못하는 공공시설 관념은 한 나라의 시민 의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5. 잊지 못할 인연들: 여행이 준 선물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제 기억 속에 특별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아마도 제가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어느 중국인 사업가는 자신의 명함과 함께 베이징 시장의 명함까지 건네주었습니다. 여행하다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의 이름을 대고 시장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호의였고, 위에서 언급한 여러 경험과 마찬가지로 당시 제가 만난 중국인들은 모두 순수하고 친절했습니다. 그 명함들을 실제로 사용할 일은 없었지만, 낯선 대륙에서 여행하는 내내 제게 든든한 부적이 되어줬습니다.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났던 6세 케냐 남자아이는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와 둘이 여행 중이었고 중국에서 1년 넘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영어, 중국어, 스와힐리어, 라틴어 등 무려 다섯 개 국어(마지막 한 개는 기억나지 않지만)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했습니다. 중국어와 영어만큼은 제가 직접 대화를 나누며 검증했는데, 외국어를 책으로 배운 저보다 훨씬 자연스러웠습니다. 아버지가 케냐의 대학교수라고 했는데, 엄마 역시 학식이 높은 분 같았습니다. 훗날 제 아이를 키우는 내내 그 아이가 떠올랐고, 저도 제 아이를 글로벌 인재로 키우고자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쯤은 케냐의 중견 인재가 되어 있을 것 같은 당시 5세? 6세? 의 외국어 천재 케냐 꼬마.(사진 발견하면 연락 바람)


또 베이징행 기차에서 만난 홍콩 신혼부부 덕분에 베이징 여행은 더욱 풍성하고 즐거웠습니다. 제가 베이징 여행을 할 예정이라고 하자 먼저 함께 다니자고 제안했고, 그들이 계획해 놓은 일정 덕분에 자금성, 이화원, 베이징동물원, 박물관, 천안문 등 여러 명소를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따라 홍콩 집까지 가게 되었는데… 오래 같이 다니다 보니 두 부부의 약간 위험했지만 사랑스러운 부부싸움도 보게 되었습니다. 중간에서 서로의 불평을 들어주며 말리기도 하면서, 저에게는 그 싸움마저 지금까지 흥미롭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ㅎㅎ~
 

1992년 홍콩부부와 함께 여행했던 천안문 광장 직찍
사람처럼 만들어 놓은 역사인물 밀랍 인형(화타로 추정)


그리고 영화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홍콩 아파트 특유의 이중 철창 자바라 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구조가 지금도 여전한지, 당시 홍콩 사회의 분위기가 얼마나 위험했기에 집집마다 그렇게 철저한 보안이 필요했는지도 새삼 궁금해집니다.


🎨 6. 집단 공장과 집단 주거 시설

대도시를 떠나 시외버스를 타고 중국 대륙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산림이 우거진 지역 한가운데에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이 아파트 단지 하나와 큰 공장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아파트 단지에 모여 사는 구조였는데, 이는 공동생활과 효율성을 중시하던 당시 사회주의 체제의 전형적인 생활 방식이자 집단주의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또한 일상 속 풍경들도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어느 중국인은 일주일 내내 같은 옷을 입고 다녔고, 그 모습은 검소함이 미덕이었던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옌타이(烟台)의 한 골목에서는 대문이 열린 틈으로 한 여성이 뻣뻣한 청바지를 손으로 빨래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세탁기가 집집마다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맨손으로 힘들게 청바지를 빠는 모습은 오래도록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중국 대륙의 생활 풍경은 우리나라의 1960~70년대 쯤으로 느껴졌고 투박했지만 순수했고, 검소했지만 힘이 있는 장면들로 가득했습니다.
 

🚨 마무리하며 – 제도와 국민성

대학 시절 정치학 수업 중 교수님이 몇 개 국가를 지정하여 그 나라들의 ‘국민성’을 분석해 오라는 과제를 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막연했고 참고자료에서도 뚜렷한 기준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과제를 어떻게 제출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엉터리 방터리로 헛소리를 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저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1992년 중국 여행은 제도가 인간을 어떻게 바꾸고 길들일 수 있는지를 그야말로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프라이버시가 거의 부재한 공중화장실, 매일 서로의 눈앞에서 생활하는 집단 주거 및 일터, 통신마저 감시되는 환경, 그리고 권력에 대한 본능적인 조심스러움. 이런 제도적 환경 속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되고, 자유보다 통제가 당연해지며, 사생활이나 개성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해지는 국민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웨이하이에서 북한 사람들을 마주쳤을 때 느꼈던 얼음 같은 침묵 역시, 제도와 감시의 분위기가 만든 ‘행동의 규범’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됐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사람이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만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어떤 나라의 국민성을 논하려면 그들이 어떤 제도 속에서 살아왔는지, 어떤 규범이 허용되고 금지되어 왔는지, 어떤 환경이 일상을 규정해 왔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을 바라보면, 1992년 중국에서 보았던 몇몇 풍경들이 스치듯 떠오르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질 때가 있습니다. 자유가 점점 축소되고, 감시적 언어가 일상으로 스며들고, 규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며, 집단 논리가 개인의 삶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조금씩 보일 때 — 그 변화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우려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검찰청이 폐지되던 날에는 가슴에 통증을 느껴 아스피린을 먹고 쉬어야 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변화는 결국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가 바뀌면, 그 공기를 마시며 창작하는 예술도 바뀌기 마련이니까요. 표현의 자유가 줄어들면 스토리가 달라지고, 창작의 숨이 막히면 서사가 변하며, 우리가 세계에 자랑해 온 한류 문화와 K-콘텐츠도 지금과는 다른 색을 띠게 될 수 있습니다.
 
국민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는 단지 행정 구조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나라 국민의 사고방식, 삶의 방식, 그리고 미래의 문화까지도 바꿔놓습니다. 1992년과 현재의 중국의 모습을 비교하며 그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에서 제도의 변화가 주는 의미를 더 무겁게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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