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

[중국 숏폼 드라마가 몰려오고 있다 #7] 제도는 왜 항상 부재하는가— 경찰·법·병원은 왜 늘 늦거나 사라지는가

CurioCrateWitch 2025. 12. 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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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숏폼 드라마가 몰려오고 있다 #7] 제도는 왜 항상 부재하는가

 

1. 경찰·법·병원은 왜 늘 늦거나 사라지는가

중국 숏폼 드라마를 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같은 의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납치, 폭행, 약물 강제, 감금 같은 명백한 범죄와 폭력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도, 경찰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습니다.
법은 있는 듯하지만 작동하지 않고,
현실이라면 가장 먼저 호출돼야 할 병원 역시 쉽게 불려오지 않습니다.

 

이 기이한 풍경은 단순한 연출상의 편의나 제작비 절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국 숏폼 드라마가 수많은 시청자를 중독적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세계관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이 장르는 ‘법과 질서가 사라진 공간’을 고집하는가?
그리고 제도가 비워진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2. 경찰: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가 아닌 ‘서사를 끝내는 장치’

숏폼 드라마 속 경찰은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등장합니다. 혹은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ReelShortDramaBox의 대표적인 ‘CEO Revenge’ 계열 시리즈를 떠올려 보십시오. 여주인공이 납치되거나 폭행을 당해도, 사건은 경찰이 아니라 남주의 사적 개입과 구원으로 해결됩니다. 경찰은 오지 않거나, 와도 이미 모든 복수와 응징이 끝난 뒤입니다.

 

이것은 설정의 허술함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배치입니다.

 

경찰이 제때 등장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고 법적 책임을 묻는 순간, 이 장르가 축적해 온 억울함, 분노, 복수의 에너지는 급격히 소멸됩니다. 경찰은 이 세계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사를 강제로 종료시키는 위험 요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반드시 “오면 안 되는 존재”, 혹은 “이미 늦은 존재”여야 합니다. 해외 시청자 커뮤니티인 Reddit의 r/CDrama에서도 “왜 이렇게 경찰이 안 오냐”는 질문은 반복적으로 제기됩니다. 그러나 이 부재야말로 시청자에게 사적 복수와 대리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3. 법: 관계의 우위 앞에서 무력화된 규칙

법 역시 존재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복수극이나 재벌 서사에서 가해자가 법적 처벌을 받는 장면은 극히 드뭅니다. 대신 등장하는 것은 남주의 자본력, 인맥, 사회적 압박입니다. 이 세계에서 법은 정의를 구현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관계와 권력 앞에서 언제든 무력화될 수 있는, 형식적인 배경 소품에 가깝습니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는 순간,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가 명확해지고, 이 장르 특유의 세계관—혈연, 집착, 절대 권력, 운명적 관계—은 무너집니다. 그래서 법은 의도적으로 제거되거나 흐릿해집니다.

 

문제는 더 이상 제도의 판단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감정의 싸움으로 떠넘겨집니다. 이 구조는 중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작동해 온 꽌시(关系) 중심 문화의 과장된 반영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시청자에게는 “제도는 믿을 수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믿을 수 있다”는 위험한 사적 정의의 쾌감을 제공합니다.


4. 병원: 상처를 ‘객관화’하지 않기 위해 선별적으로 호출되는 공간

중국 숏폼 드라마에서 병원은 자주 등장하는 편입니다. 여주인공의 임신 진단이나 친자확인 검사 등의 이유로 자주 등장하며, 여주인공이 손을 살짝다쳐 피가 살짝 날 정도의 경미한 상처에도, 남주는 곧바로 여주를 번쩍 안아서 병원으로 데려갑니다. 육체적 외상은 즉각적인 보호와 과잉 돌봄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최음제나 약물 강제와 같은 피해의 경우, 인물들은 병원을 피합니다. 이때 여주는 혼자 버티거나, 남주의 개인적 보살핌 속에서 ‘조용히’ 회복됩니다. 병원으로 가는 순간, 이 사건은 로맨스나 오해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범죄와 책임의 영역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5. 제도가 비워진 자리에 들어서는 ‘감정의 독재’

모든 공적 시스템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사람과 감정뿐입니다. 미셸 푸코의 ‘권력–지식–주체의 상호 구성’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제도의 부재는 결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특정 관계와 감정 서사를 유일한 판단 기준처럼 주입하는 교묘한 권력의 작동 방식입니다. 제도가 사라질수록 개인, 특히 여성 피해자는 더 많은 감정적 부채를 떠안게 됩니다. 고통은 “사랑의 증명”으로 포장되고, 이는 다시 통제와 집착이라는 폭력의 순환을 정당화합니다.

 

💡 [참고] 미셸 푸코의 ‘권력–지식–주체의 상호 구성’이란?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는 권력이 단순히 누군가를 억압하는 힘이 아니라, 무엇이 '진실'인지 규정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드라마 세계관에 대입해보면, 경찰이나 법(제도)이 사라진 자리에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어"라는 식의 잘못된 지식(서사)이 들어앉게 됩니다. 그러면 피해자는 이 잘못된 논리를 마치 정답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고, 스스로를 '사랑을 위해 고통받는 주체'로 재구성하게 됩니다. 즉, 제도의 부재 자체가 권력이 되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게 되는 것이죠.

 

해외에서 이 장르가 “Toxic Tropes(독성 강한 클리셰)”라고 비판받는 이유 역시, 제도의 부재를 통해 여성의 고통을 서사적 시험대로 전락시키고 이를 '정상적인 사랑'인 것처럼 학습시키기 때문입니다.


✨ 6. 맺음말: 의도된 진공 상태, 위험한 거울

중국 숏폼 드라마에서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제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제도가 사라진 자리에 감정을 최대한 밀어 넣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진공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야 시청자는 분노하고, 몰입하고, 중독됩니다.

 

이 시리즈가 반복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제도가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은 얼마나 쉽게 서로를 망가뜨릴 수 있는가.

 

이 서글픈 판타지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현대인의 불안을 가장 노골적으로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과연 제도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그리고 개인의 감정이 과잉될 때 발생하는 폭력의 순환을 어디에서 끊어야 할까요?


[다음 연재 예고]

제도 부재가 왜 특히 여성에게 더 가혹한지, 그리고 ‘강한 여주’ 서사가 어떻게 고통을 미화하는 함정이 되는지 파헤쳐 봅니다. 왜 피해자는 늘 “버텨내야만” 구원받는 존재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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