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조선 예조의 답신과 대마도 사신의 태도
📜 원문 발췌
自禮曹覆書曰: "弊邦禁束漁氓, 使不得出於外洋, 雖弊境之鬱陵島, 亦以遼遠之故, 不許任意往來, 況其外乎? 今此漁船, 敢入貴境竹島, 致煩領送, 遠勤書諭, 隣好之誼, 實所欣感, 海氓獵漁, 以爲生理, 不無漂轉之患, 而至於越境深入, 雜然漁採, 法當痛徵。 今將犯人等, 依律科罪, 此後沿海等處, 嚴立科條而申勅之。" 仍以校理洪重夏, 差接慰官, 至東萊倭館, 則橘眞重, 見覆書中弊境鬱陵之說, 甚惡之, 謂譯官曰: "書契只言竹島固好, 必奉鬱陵者, 何也?" 仍屢請刪改, 而私送其從倭, 通議於馬島, 殆至半月, 遷延未決。 重夏使譯官責之。 從倭私謂譯官曰: "島主必欲刪鬱陵二字, 而如有難處者, 亦許受書正官之委曲請改, 自爾如此。" 又迭爲游辭以爭之, 朝廷終不聽。 橘眞重計窮情露, 乃受書以歸。
📚 번역
조선 예조(禮曹)는 일본 측에 공식 답신을 보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민들을 단속하여 먼 바다(外洋)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울릉도는 분명 우리나라 경계 안에 있으나, 거리가 멀어 쉽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하물며 그 외의 지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번에 어선이 감히 귀국의 죽도에 들어가 폐를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수고로이 송환해 주시고 멀리서 서신으로 타이르시니, 이웃 나라 간의 우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해안의 백성들이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잇다 보니 표류하는 일도 없지는 않지만, 국경을 넘어 깊이 들어가 마구잡이로 조업을 한 것은 법에 따라 엄히 다스려야 할 일입니다. 이번에는 관련자들을 법에 따라 처벌하고, 앞으로 해안 지역에 엄격한 규정을 세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조선은 예문관 소속의 외교 문서 담당 관리였던 교리(校理) 홍중하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임명해, 동래 왜관으로 보내 일본 사신을 접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측 정식 사신, 즉 정관(使正官)이었던 기쓰 신쥬(橘眞重)는 답신 내용 중 ‘우리나라 경계인 울릉도’라는 표현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는 조선 역관(譯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한에는 죽도만 언급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울릉도까지 적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는 울릉도 언급을 삭제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고, 자기 수행원인 **종왜(從倭)**를 따로 보내 대마도와 협의하게 하면서 보름 가까이 회신을 미뤘습니다. 이에 홍중하는 역관을 통해 따끔하게 항의했고, 종왜는 몰래 이렇게 말합니다.
“도주(島主)께서 반드시 '울릉' 두 글자를 삭제하길 원하십니다. 혹시 어려우면, 서한을 받는 정식 사신에게 조심스럽게 수정을 요청하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일본 측은 여러 차례 표현을 바꿔가며 조선 조정을 설득하려 했지만, 조선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쓰 신쥬는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조선의 원안 그대로 서한을 받아들고 돌아갔습니다.
🔍 해설
이 문서에서 조선 예조는 일본 측의 ‘죽도’ 주장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예조는 ‘우리나라 경계인 울릉도’라는 표현을 통해, 울릉도가 명백한 조선 영토임을 다시 한 번 공식화한 것입니다.
비록 “요원하여 왕래를 금한다”는 표현을 덧붙이긴 했지만, 이는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멀긴 해도 조선의 땅이기 때문에 규제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귀국 죽도에 들어가 폐를 끼쳤다’는 표현은 얼핏 보면 일본 측 입장을 인정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외교적 체면을 세워주는 표현일 뿐이고, 조선은 어민들을 엄히 처벌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자국의 주권을 단호히 지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측 사신인 기쓰 신쥬는 바로 이 '울릉도'라는 표현 하나를 문제 삼아 계속해서 삭제를 요구합니다.
특히 대마도 도주까지 나서서 ‘울릉’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라고 압박한 점에서, 일본이 이 표현을 조선의 명백한 영토 선언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조선 조정은 일본 측의 끈질긴 요청에도 불구하고 서한 내용을 단 한 글자도 바꾸지 않았고, 일본은 울릉도 표현이 담긴 서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1690년대부터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외교적 충돌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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