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숙종 20년 2월 23일(1694년)
울릉도에 대해 왜인(倭人)에게 보냈던 서계(書契, 국서 또는 공식 외교문서)가 모호하다 하여, 찾아오게 하다
[1-1] 조선 어민 납치와 일본의 다케시마(竹島, 죽도) 영유권 주장
📜 원문 발췌
癸酉春/ 蔚山漁採人四十餘口, 泊船於鬱陵島。 倭船適到, 誘執朴於屯、安龍福二人而去。 及其冬, 對馬島使正官橘眞重, 領送於屯等, 仍請禁我人之漁採於竹島者, 其書曰:
"貴域瀕海漁氓, 比年行舟於本國竹島, 土官詳諭國禁, 固告不可再。 而今春漁氓四十餘口, 入竹島雜然漁採, 土官拘其二人, 爲一時證質。 本國因幡州牧, 馳啓東都, 令漁氓附與弊邑, 以還故土。 自今以後, 決莫容船於彼島, 彌存禁制, 使兩國交誼, 不坐釁郄。"
📚 번역
1693년 봄, 울산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에 배를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일본 배가 도착해, 박어둔과 안용복 두 사람을 꾀어내어 붙잡아 끌고 갔습니다. 그해 겨울, 쓰시마섬(對馬島, 대마도)에 파견된 사신 정관 기쓰 신쥬(橘眞重, 길진중)가 박어둔 등을 이끌고 조선으로 송환하면서, 조선 어민의 다케시마(竹島, 죽도) 조업을 금지해 달라는 요청을 전달하였습니다. 그의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귀국 연해의 어민들이 최근 몇 년간 우리 본국의 다케시마에 배를 대고 있습니다. 이에 토관(土官, 지역의 관리)이 국법에 따라 엄중히 금지하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올해 봄, 조선 어부 40여 명이 다케시마에 들어와 무질서하게 조업을 하여, 그중 두 사람을 붙잡아 일시적인 증거로 삼았습니다.
우리 본국은 이나바(因幡, 인엽) 지방의 목사(牧使, 일본 에도 시대의 지방 행정관)를 통해 에도(江戶, 강호) 막부에 보고하였고, 이 어부들을 우리 번(藩)에 일단 인계한 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결단코 해당 섬에 조선 배가 정박하는 일이 없도록 금지 조치를 강화하여, 양국의 우호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일본 측 문서에서 사용된 ‘다케시마(竹島, 죽도)’는 당시 울릉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일본이 독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다케시마(たけしま)'와는 표기만 같을 뿐, 같은 섬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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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기록은 1693년 울릉도 인근에서 발생한 조선 어민 피랍 사건과, 이에 대한 일본 측의 외교적 대응을 정리한 최초의 공식 문서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20년, 1694년에 기재되어 있지만, 사건 자체는 1693년 봄에 일어난 것으로 명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 기사에서 안용복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실록에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박어둔과 함께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중 일본 선박에 의해 붙잡혀 간 인물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어민 납치를 넘어,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독도 영유권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함께 끌려갔던 박어둔도 있었지만, 이후 기록에서는 안용복만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안용복이 1696년 일본에 다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당당하게 주장하며 일본 측과 직접 담판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박어둔은 이후 공식 문서나 실록에 별다른 활약이 기록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역사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안용복이 이 사건과 독도 영유권 문제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 어민들이 울릉도에서 정기적으로 어업 활동을 해왔다는 점은, 울릉도가 조선인의 실질적 생활권이자 어업기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이는 훗날 일본이 제기한 ‘울릉도 무주지(terra nullius)’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더 주목할 만한 점은, 일본 측에서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에 ‘유집(誘執)’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는 ‘꾀어 붙잡았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납치 행위를 완곡하게 표현한 책임 회피적 용어입니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이 일본 측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여 실록에 기록합니다. 이는 조선이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 갈등을 조율하려는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조선 조정이 외교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자국의 조업권과 영토 주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또한, 사건 이후 기록이 안용복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이 외교와 내정의 경계에서 ‘기억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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