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숙종 20년 2월 23일(1694년)
남구만과 신여철의 울릉도·독도 수호 주장
📜 원문 발췌
是夏, 南九萬白上曰: 東萊府使報: ‘倭人又言, 「朝鮮人入於吾竹島, 宜禁其更入也」 臣見《芝峰類說》, 【故判書李晬光所著, 芝峯卽其號。】 倭奴占據礒竹島, 礒竹, 卽鬱陵島也。 今倭人之言, 其爲害, 將無窮, 前日答倭書, 殊糢糊, 宜遣接慰官, 推還前書, 直責其回賓作主可也。’ 新羅圖, 此島亦有國名, 納土貢。 高麗 太祖時, 島人獻方物。 我太宗朝, 不勝倭患, 遣按撫使, 刷出流民而空其地, 今不可使倭居之。 祖宗疆土, 又何容與人乎?" 申汝哲曰: "臣聞寧海漁人, 島中多大魚, 又有大木大竹如杠, 土且沃饒, 倭若據而有之, 旁近江陵、三陟必受其害。" 上用九萬言, 命還前書。
📚 번역
그해 여름, 남구만이 임금께 아뢰었다. “동래부사(부산 지역의 지방관)에게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왜인들이 다시 말하길, “조선 사람이 우리 죽도에 들어왔으니,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이 『지봉유설』을 찾아보니, (이 책은 고(故) 이수광 판서가 지은 것으로, ‘지봉’은 그의 호이다) 그 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왜인이 이소타케시마(礒竹島)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소타케시마는 바로 울릉도다.’
지금 일본이 하는 말은, 그 의도가 매우 위험하며 장차 큰 피해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우리가 보낸 답장은 지나치게 애매했습니다. 이제는 접위관(외교 담당 관리)을 보내 그 답장을 돌려받고, “손님이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하려 한다”는 말로 그들의 무례를 따끔하게 꾸짖어야 합니다.
신라 시대 지도에도 이 섬(울릉도)은 국가의 공식 명칭이 있었고, 조공을 바친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태조 때도 섬 사람들이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우리 조선 태종 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심해져 안무사(치안 담당 관리)를 보내 백성들을 철수시키고 섬을 비워둔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땅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우리 강토인데, 어찌 남에게 내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신여철도 나서서 아뢰었다. “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영해(경북 지역)의 어부들 말로는 울릉도에는 큰 물고기가 많고 기둥만 한 큰 나무와 대나무도 있으며, 흙도 아주 비옥하다고 합니다. 만약 왜인들이 그 섬을 차지한다면, 가까운 강릉과 삼척이 반드시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은 남구만의 의견을 따라, 일본에 보냈던 답장을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 해설
1694년 여름, 조선 조정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을 ‘죽도(竹島)’에 출입시키지 말라며 항의했고, 이에 남구만과 신여철은 조선의 강력한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핵심 요약
이 기록은 조선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 영토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남구만과 신여철은 일본의 침탈 시도를 경계하며, 조선의 역사적 권리와 전략적 가치, 외교적 대응 방향을 조목조목 짚어냈습니다.
1. 조선의 영토 인식과 역사적 근거 제시
📍 일본 명칭에 대한 정확한 대응
남구만은 일본이 말하는 ‘죽도(竹島)’와 ‘이소타케시마(礒竹島)’가 바로 조선의 울릉도임을 지적합니다.
이는 일본 측 지명이 단순히 '다른 섬'이 아닌, 조선이 실효 지배하던 울릉도와 동일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역사적 영유권 강조
그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울릉도가 조정의 통치 아래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 신라 시대: 국가의 공식명칭 존재, 토공 납부
• 고려 태조 시기: 섬 주민들의 방물 헌납
• 조선 태종 시기: 왜구의 침입으로 섬을 일시 비움 (공도 정책)
이처럼 남구만은 ‘비워두었다고 하여 영토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2. 일본 도발에 대한 강경 대응 촉구
📍 외교문서의 모호성 비판
남구만은 이전에 조선이 일본에 보낸 답신이 너무 애매하고 소극적이었다며,
그대로 두면 장차 큰 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 “손님이 주인 행세”
그는 일본의 주장을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고 비판합니다. 이는 일본의 도발을 ‘영토 침탈’로 간주하고, 조선이 더 이상 외교적 수세에 머무르지 말고 주권을 수호하라는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3. 울릉도·독도의 전략적·경제적 가치 강조
신여철은 울릉도의 자원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섬 안에는 큰 물고기가 많고, 기둥만 한 나무와 대나무도 있으며, 흙도 비옥하다.”
그는 만약 일본이 이 섬을 차지하게 된다면, 강릉, 삼척 등 동해안 일대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 발언은 울릉도·독도가 단지 ‘작은 섬’이 아니라, 백성의 삶과 국가 안보에 직결된 핵심 영토임을 상기시킵니다.
4. 숙종의 정책 전환과 외교적 의지
남구만의 주장을 들은 숙종은, 일본에 보냈던 외교 문서를 다시 회수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조선이 이제 소극적 대응에서 벗어나 강경한 외교 노선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결정입니다.
이날의 결정은 단순한 한 편의 기록을 넘어서,
울릉도·독도에 대한 조선의 강력한 영유권 천명이자,
그 주권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역사적 의지의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참고자료 ]
• 『조선왕조실록』 숙종 20년 2월 23일
•『지봉유설』, 이수광
• 동래부사 보고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