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숙종 20년 8월 14일 (1694년)
울릉도 문제로 왜(倭, 일본)와 문서를 주고 받다 — 울릉도 영유권 논쟁의 심화
[2-1] 울릉·죽도 표기를 둘러싼 외교 충돌과 조선의 대응
📜 원문 발췌
初南九萬以鬱陵島事, 白上, 議遣接慰官, 直責其回賓作主, 及倭差還, 持春間所受回書而至, 又致對馬島主書曰:
"我書曾不言鬱陵回書, 忽擧鬱陵二字, 是所難曉, 只冀刪之。"
九萬遽欲從其言, 改前書。
尹趾完執不可曰:
"旣以國書, 付之歸使, 何取復來請改乎? 今若責之以竹島是我鬱陵島, 我人之往, 何嘗犯界乎? 則倭必無辭矣。"
九萬遂以此入奏。
上曰:
"狡倭情狀, 必欲據而有之, 其依前日所議, 直辭以報之。"
📚 번역
처음에 남구만(南九萬)이 울릉도 문제를 임금께 아뢰며, 접위관(接慰官)을 파견해 왜인(倭人)에게 ‘손님이 도리어 주인이 되려 한다’고 꾸짖도록 하자는 논의를 올렸다.
이후 왜인 사신이 지난 봄 조선에서 받은 회답 서계(書契, 조선 시대에 일본 정부와 주고받던 문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가, 다시 대마도주의 서계를 지참해 아뢰기를,
“귀국의 회답 서계에는 ‘울릉’이라는 말이 갑자기 등장하였습니다. 당초 우리 서계에서는 ‘울릉(鬱陵)’을 언급한 적이 없는데, 왜 ‘울릉’ 그 두 글자가 거론됐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표현을 삭제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남구만은 그들의 요구를 따라 이전에 작성한 서계를 수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윤지완(尹趾完)은 강하게 반대하며 말했다. “이미 서계를 사신에게 주어 보냈는데, 어떻게 다시 와서 고쳐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오히려 ‘죽도는 곧 우리나라의 울릉도이며, 우리 백성이 왕래한 것이 어찌 국경을 침범한 것이겠는가?’라고 꾸짖는다면, 왜는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남구만은 윤지완의 말을 그대로 임금께 아뢰었다.
임금은 말씀하였다. “교활한 왜인의 정황으로 보아, 반드시 그 땅을 점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속셈이 있으니, 전날 논의한 바에 따라, 에둘러 말하지 말고 분명히 답하라.”
🗂️ 핵심 요약
1694년 8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간 외교 문서 속에는 울릉도(鬱陵島)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담겨 있습니다. 일본은 조선이 보낸 답신에 포함된 ‘울릉’이라는 지명을 삭제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조선은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 과정에서 윤지완의 원칙적 대응과 숙종의 강경한 지시는 조선의 영토 수호 의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 해설
1. 일본의 ‘울릉’ 명칭 삭제 요구와 조선의 단호한 거부
• 일본의 전략: ‘울릉’이라는 지명을 삭제해, 죽도(竹島)와 울릉도(鬱陵島)를 연결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이며, 조선의 영유권 주장을 원천 차단하려는 외교적 의도가 담겨 있다 흐리려는 의도가 명확합니다.
• 조선의 원칙적 대응: 윤지완은 이미 발송된 국서를 다시 수정하는 것은 외교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며, 일본의 야욕을 꿰뚫는 논리로 정면 대응합니다.
• 숙종의 판단: 숙종은 “교활한 왜인”이라는 표현을 통해 일본의 영토 야욕을 인식하고, 단호하게 맞설 것을 지시합니다.
2. ‘죽도=울릉도’라는 확고한 인식
윤지완은 죽도가 곧 조선의 울릉도라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지리적 동일성에 대한 조선의 내적 합의를 보여줍니다.
조선 백성들이 울릉도로에 왕래하는 것은 '국경 침범이 아니다'라는 주장 역시 울릉도가 본래 조선 영토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3. 강경책 유지와 영토 수호 의지
숙종의 지시는 단순한 외교 대응이 아니라, 영토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조선의 국가적 책임감과 정체성 수호 의지를 대변합니다.
이 논의는 단순한 지명 삭제의 문제가 아닌, 울릉도에 대한 실질적 영유권을 사수하려는 국제적 외교 전선이었음을 보여줍니다.
[ 참고 자료 ]
• 『숙종실록』 숙종 20년 8월 14일자 기사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규장각 원문 병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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