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숙종 22년 9월 25일 (1696년) | 비변사에서 안용복 등을 추문하다
📜 원문
遂使李仁成, 構疏呈納, 島主之父來懇伯耆州曰: ‘若登此疏, 吾子必重得罪死, 請勿捧入。’ 故不得稟定於關伯, 而前日犯境倭十五人, 摘發行罰。 仍謂渠曰: ‘兩島旣屬爾國之後, 或有更爲犯越者, 島主如或橫侵, 竝作國書, 定譯官入送, 則當爲重處。’ 仍給糧, 定差倭護送, 渠以帶去有弊, 辭之。" 云。 雷憲等諸人供辭略同。 備邊司啓請: "姑待後日登對稟處。" 允之。
📚 번역
드디어 이인성(李仁成)에게 상소문을 작성해 올리게 하자, 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伯耆州, 호키슈: 지금의 일본 돗토리현)에 찾아와 간곡히 말했습니다.
“이 상소문이 올라가게 되면, 제 아들은 큰 죄를 지게 되어 결국 죽게 될 것이니, 부디 올리지 말아 주십시오.”
이러한 간청으로 인해, 상소문을 일본 중앙 정부인 관백(關白)에게 올려 정식 재가를 받는 절차를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기주 측에서는 그에 앞서 조선 영토를 침범한 왜인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했고, 이어 도주는 안용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두 섬이 이미 귀국(조선)에 속한 이후로, 혹시라도 다시 침범하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임의로 넘어오는 일이 생긴다면, 조선 국왕의 국서를 작성하고 역관(譯官)을 붙여 정식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엄중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이후 일본 측은 안용복에게 양식을 지급하고 호송을 맡을 왜인까지 정해주었지만, 안용복은 그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혹여 폐단이 생길까 염려되어 이를 정중히 사양하였다고 합니다.
뢰헌(雷憲) 등 다른 인물들의 진술도 대체로 이와 같았습니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우선 뒷날 임금께 직접 아뢸 기회를 기다려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하였고, 왕은 이를 윤허하였습니다.
🔍 해설: 일본 본토에서의 외교적 성과와 조선 조정의 대응
이번 기록은 안용복이 일본 본토, 특히 백기주에서 거둔 외교적 성과와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 과정을 보여줍니다.
1. 안용복의 강한 외교 압박과 일본 측의 반응
안용복이 일본의 최고 권력층인 관백에게 상소를 하겠다고 하자, 오키섬 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까지 찾아와 상소를 막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는 안용복의 움직임이 일본 내부에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비록 상소는 끝내 제출되지 못했지만, 백기주 측에서 과거 조선 영토를 침범한 왜인 15명을 처벌한 것은 안용복의 항의가 실제 외교적 압력으로 작용했음을 뜻합니다.
2. 일본 지방관의 입장 표명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백기주 도주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일정 부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앞으로 다시 침범하는 자가 발생하거나 도주가 무단으로 조선 영토를 침입할 경우, 조선의 국서와 역관을 통해 정식으로 통보해주면 엄중히 처리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는 일본 중앙 정부 차원은 아니더라도, 지방 정부 차원에서는 조선의 영유권을 어느 정도 수용한 발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민간인의 신분으로 이러한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낸 안용복의 행동은 매우 이례적이며,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3. 신중한 판단을 보여준 안용복
일본 측에서 제공한 호송 인력을 안용복이 거절한 부분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이는 일본 측의 호의가 자칫 외교적 명분으로 오용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조선 정부에 불리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한 매우 신중한 판단으로 해석됩니다.
4. 조선 조정의 신중한 대응 기조
안용복의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 즉 비변사는 곧바로 처결하지 않고, 임금께 직접 아뢴 뒤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보고합니다. 이는 안용복의 활동이 전례 없는 민간 외교였기 때문에, 그 파장을 면밀히 살피고자 했던 조정의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