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속 인물과 기록/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속 안용복 #19] [7] 숙종 22년 9월 27일 | “안용복, 죄인이었을까? 영웅이었을까?” – 조선 조정의 고민과 외교의 기로

CurioCrateWitch 2025. 6. 2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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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숙종 22년 9월 27일 (1696년) | 안용복, 죄인이었을까? 영웅이었을까?” – 조선 조정의 고민과 외교의 기로

부제: 민간 외교와 외교 원칙 사이에서 조선이 내린 판단은?

📜 원문


庚辰/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柳尙運曰: "安龍福不畏法禁, 生事他國, 罪不可容貸。 且彼國解送漂海人, 必自對馬島, 例也, 而直自其處出送, 不可不以此明白言及, 而龍福姑待渡海譯官還來後, 置斷宜矣。" 左議政尹趾善亦以爲然。 刑曹判書金鎭龜曰: "臣以領相之言, 往問右議政徐文重, 以爲: ‘此事所關不輕。 自古交隣之事, 初似微細, 末或至大。 對馬島若聞龍福之事, 必憾怒我國。 宜先通報, 而囚龍福等, 以待彼中消息, 然後論斷。’ 判府事申翼相以爲: ‘通告對馬島, 似不可已, 而聽其所言後處置, 有同稟令, 一邊通告, 一邊處斷, 似當。’ 云矣。"



📚 번역


경진일(庚辰日)에 임금께서 대신들과 비변사(備邊司)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셨습니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안용복은 법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저 나라에서 표류한 사람을 돌려보낼 때는 반드시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섬)를 거쳐야 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번에는 백기주(伯耆州)에서 곧바로 (안용복을) 내보낸 점에 대해서도 (일본에) 명확히 언급해야 합니다. 안용복은 일단 (일본에 파견된) 역관이 바다를 건너 돌아온 뒤에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좌의정 윤지선(尹趾善)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형조판서 김진구(金鎭龜)는 아뢰기를,
“신이 영의정의 말씀을 듣고 우의정 서문중(徐文重)을 찾아가 자문하였더니, 서문중은 ‘이 일은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이웃 나라와의 외교는 처음에는 사소해 보여도 결국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쓰시마섬이 안용복의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원망하고 분노할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먼저 (일본에) 통보하고, 안용복 등을 구금한 채 저쪽의 반응을 기다린 후 논단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또 판부사 신익상(申翼相)은 말하기를,
“쓰시마섬에 먼저 통보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듯하나,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은 뒤에 처리한다면 마치 우리가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통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스스로 안용복을) 처단하는 조치를 함께 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해설: 안용복의 죄와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대한 조선 대신들의 논의


이 기록은 안용복 사건을 두고 조선 고위 대신들 사이에서 오간 복잡한 의견 대립과 외교적 고민을 잘 보여줍니다. 단순히 한 인물의 처벌을 둘러싼 문제를 넘어서, 이를 계기로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미칠 파장과 조선의 대응 기조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영의정 유상운의 강경론 – 외교 원칙과 법질서의 수호


영의정 유상운은 안용복이 "법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 문제를 일으켰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죄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민간인의 자의적 외교 개입을 엄격히 금지하려는 조선의 국가 원칙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일본이 표류인을 돌려보낼 때 반드시 대마도(對馬島)를 통해야 한다는 관례를 무시하고, 백기주에서 직접 안용복을 귀국시킨 점을 지적하며, 이 외교 절차 위반을 일본 측에 명확히 따져 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만 안용복의 처벌은, 그와 함께 일본에 간 역관이 돌아온 뒤로 미루자고 하여, 사실관계와 외교적 정황을 먼저 파악한 후 신중하게 판단하자는 태도도 함께 보였습니다. 이는 법과 원칙에 근거한 강경한 입장이면서도, 무작정 성급하게 처리하지 않겠다는 전략적 판단이 깔린 것입니다.



2. 서문중의 신중론 – 외교 파장을 우려한 조율 중심의 입장


형조판서 김진구의 보고를 통해 전달된 우의정 서문중의 입장은 더욱 조심스럽고 외교적입니다. 그는 “이 일이 가볍지 않다”고 하며, "이웃 나라와의 교류는 처음에는 미미한 듯하나, 나중에는 크게 번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서문중은 쓰시마섬 측이 안용복의 활동을 알게 되면 조선을 원망하고 크게 분노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감안하여 일본 측에 먼저 통보하고, 안용복 등을 일단 구금한 채 저들의 반응을 살펴본 뒤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는 국제 관계에서 감정적 충돌을 피하고, 대외 이미지와 외교 균형을 고려한 전형적인 '온건 신중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신익상의 현실론 – 자존심과 외교 사이의 절충안


판부사 신익상은 일본에 통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일본의 반응을 기다렸다가 조선이 뒤늦게 처단하면 “마치 그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냅니다.

그는 외교적 예의를 갖추기 위해 통보는 하되, 조선 스스로 판단하여 동시에 처단 조치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합니다. 이 입장은 조선의 자주 외교 노선을 지키면서도, 실질적인 외교 마찰을 줄이려는 현실적 방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민간 외교의 위험성과 제도화되지 않은 대응체계의 한계


이 논의 속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당시 조선에는 민간인이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상황에 대한 제도적 대비책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안용복은 어떤 공식 임무도 없이, 스스로 바다를 건너 외교적 발언과 협상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당시 체제에서는 위험한 월권이자, 외교 문법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일본 관료에게서 영토 인정을 암시하는 발언을 받아내고, 침입한 왜인을 처벌하게 만든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성과와 위반’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깊은 고민에 빠졌고, 이를 통해 우리는 외교의 제도화 이전 시기의 한계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  총정리

조선 조정은 안용복의 행동을 단순한 개인의 일탈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일본과의 민감한 외교 관계 속에서 어떻게 국가적 체면을 지키고 자주성을 유지할지, 외교 원칙을 어디까지 엄격히 적용할지에 대한 복합적인 판단과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조선이 이미 17세기 후반에 자국의 외교적 입지와 체면, 국제질서 속의 상호작용을 의식하며 대응했다는 증거로, 단순한 국지적 사건이 아니라 국가 전략적 판단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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