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 22년 10월 13일 (1696년)
[3-9] 신여철: 법과 외교 사이, 균형의 안목
📜 원문
知中樞府使申汝哲曰, 久在病伏中, 未得參於廟議, 而第聞龍福之事, 斷以死罪云, 臣意則不然。
龍福, 以濫猾之民, 稱以國使, 呈文他國, 其所爲, 極其過甚, 而犯越之罪, 當死無赦。
然而功過相準, 國家所不能爲之事, 渠以無知小民, 能爲上書於彼國, 島主之居在中間, 欺蔽江戶, 出船自食等事, 盡言之, 在外大臣所謂, 殺龍福, 則島主必悅之云者, 其言正是矣。 龍福, 不可以一罪斷之矣。
📝 번역
중추부사 신여철이 말하였다.
“저는 병으로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안용복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안용복은 간사하고 제멋대로인 백성으로서, 스스로를 조선의 사절이라 칭하고 일본에 문서를 제출한 일은 실로 매우 지나친 행동이며, 국경을 넘은 죄로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공로와 허물은 함께 저울질해야 합니다. 국가가 감히 하지 못했던 일을, 무지한 민간인이 해낸 점은 분명히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대마도주는 울릉도 인근 해역에서 조선 어민들이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던 현실을 에도(江戸, 에도) 막부에 숨기고 속여 왔습니다. 안용복은 그런 그들의 실상을 모두 밝힌 것입니다.
외부 대신들이 ‘안용복을 죽이면 대마도주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야말로 사건의 본질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용복은 단 하나의 죄만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 [해설] 안용복 사건: 법과 외교 사이, 신여철의 균형 잡힌 통찰
안용복 사건의 마지막 국면에서 중추부사 신여철은 기존의 일반적인 시각을 초월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사형 논의가 한창이던 그때, 그는 "죄와 공을 함께 저울질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며 조정의 시야를 넓힙니다.
죄를 인정하되, 공을 외면하지 않다
신여철은 안용복의 행동이 명백한 위법임을 분명히 합니다. 조정의 허가 없이 일본에 건너가 스스로를 조선 사절이라 칭하고 상소문을 제출한 것은 국경을 넘은 중죄이며,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사안이라고 평가하죠.
하지만 그는 그 죄만으로 안용복을 단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꿰뚫은 핵심은 단 한 줄입니다.
"국가가 감히 하지 못한 일을, 무지한 백성이 해냈다."
안용복은 조선이 오랫동안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쓰시마섬(對馬島, 대마도)의 외교 기만 구조를 일본 중앙정부 앞에서 고발했습니다. 대마도 도주는 조선 어민들이 울릉도 인근 해역에서 어로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실효적 지배)을 숨기고, 해당 지역이 일본 영토인 양 왜곡하여 에도 막부에 행정 개입을 요청해 왔죠.
안용복은 이 구조의 허점을 흔드는 상소 한 장을 제출했습니다. 그는 대마도를 통하지 않고 일본 본토 호키슈(伯耆州, 백기주)를 찾아가, 조선의 입장을 담은 문서를 직접 전달했습니다. 이는 민간인의 무단 월경을 넘어, 조선 조정조차 회피해왔던 구조적 외교 왜곡을 정면으로 폭로한 행동이었습니다.
"죽이면 대마도 도주가 기뻐할 것이다" – 통찰의 한 문장
신여철은 이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그를 죽이면 대마도 도주가 기뻐할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안용복의 처형이 조선 스스로 대마도의 의도에 부응하고, 외교적 주권을 포기하는 행위가 될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입니다.
안용복은 조정 대신들조차 나서지 못했던 외교의 최전선에 발을 디딘 인물이었고, 그 결과 일본 측으로부터 조선의 영유권을 확인받는 문서까지 확보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대마도를 통한 간접 외교에 갇혀 있었고, 에도 막부와의 직접 외교는 체제와 명분, 감정 면에서 모두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용복은 동료들과 함께 그 한계를 넘어 일본 본토로 향했고, 조정 대신들은 일본 측의 반응을 지켜보며 속으로 이렇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나서도 됐었겠구나. 일본이 생각보다 합리적이네."
그동안 스스로 포기하고 있던 직접 외교의 가능성이, 아이러니하게도 한 어민의 무단 행동을 통해 눈앞에 펼쳐졌던 것입니다.
그 성과는 조선 외교 전략의 고착된 균형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조정은 안용복을 처벌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결과'는 무시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었죠. 바로 그 지점에서 조선 조정은, 그의 죄를 말하면서도 그를 쉽게 버리지 못한 채 오랜 시간 결정을 유보했던 것입니다.
균형의 시선, 신여철
신여철은 법과 질서의 원칙, 외교적 현실, 국가의 책임, 그리고 개인의 성과를 함께 바라본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고, 정치 논리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복잡한 사안의 핵심을 명료하게 꿰뚫고, 조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 인물입니다.
"안용복을 가장 정확히 이해한 조정 인물은 누구인가?" 그 질문에 제일 먼저 떠올라야 할 이름은, 바로 신여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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