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속 인물과 기록/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속 안용복 #13] [3] 숙종 22년 8월 29일 | 동래사람 안용복 등이 일본국에서 송사하고 돌아오니 잡아 가두다

CurioCrateWitch 2025. 6. 8. 12:52
반응형

 



[3] 숙종 22년(1696년) 8월 29일 | 동래사람 안용복 등이 일본국에서  송사하고 돌아오니 잡아 가두다

📜 원문 발췌


○東萊人安龍福、興海人劉日夫、寧海人劉奉石、平山浦人李仁成、樂安人金成吉、順天僧雷憲ㆍ勝淡ㆍ連習ㆍ靈律ㆍ丹責ㆍ延安人金順立等, 乘船往鬱陵島, 轉入日本國 伯耆州, 與倭人相訟後, 還到襄陽縣界, 江原監司沈枰, 捉囚其人等馳啓, 下備邊司。


📚 번역

동래 사람 안용복(安龍福), 흥해 사람 유일부(劉日夫), 영해 사람 유봉석(劉奉石), 평산포 사람 이인성(李仁成), 낙안 사람 김성길(金成吉), 순천 승려 뇌헌(雷憲)ㆍ승담(勝淡)ㆍ연습(連習)ㆍ영률(靈律)ㆍ단책(丹責), 연안 사람 김순립(金順立) 등이 배를 타고 울릉도(鬱陵島)로 갔다가 다시  일본의 호키슈(伯耆州, 백기주)로 건너가 송사를 벌였다. 그곳에서 왜인들과 송사(訟事, 소송)를 한 후, 양양현(襄陽縣) 경계로 돌아오니, 강원 감사 심평(沈枰)이 그들을 붙잡아 가두고 급히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 사건은 비변사(備邊司)로 이첩되었다.


🔍 해설 국경을 지키려 나선 백성들과, 그들을 제어하려 했던 조선 조정

1696년, 숙종 22년. 울릉도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던 그때, 한 무리의 조선 민간인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 본토에 상륙해 조선의 영유권을 직접 주장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 안용복이 있었고, 그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모인 11명의 백성들이 뜻을 함께했습니다.


1. 전국 각지에서 모인 자발적 민간 외교 사절단

조정의 공식 파견도 아니었고, 정부의 지원도 없었지만 이들은 조선의 바다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함께 뭉쳤습니다.

동해, 남해, 서해를 아우르는 조선의 연해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 배를 타고 울릉도를 거쳐 당시 일본의 호키슈(伯耆州)로 건너가 송사를 벌였습니다.

호키슈는 에도 시대에 사용된 지역 명칭으로, 오늘날의 일본 돗토리현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이들의 출신지와 이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동래(東萊, 부산 동래구): 안용복 (安龍福)

• 흥해(興海, 경북 포항): 유일부 (劉日夫)

• 영해(寧海, 경북 영덕): 유봉석 (劉奉石)

• 평산포(平山浦, 강원 고성/양양 추정):   이인성 (李仁成) – 기록 담당자로서 글자를 아는 문식 계층으로 추정

• 낙안(樂安, 전남 순천 낙안면): 김성길 (金成吉)

• 순천(順天): 승려 5명 – 뇌헌(雷憲), 승담(勝淡), 연습(連習), 영률(靈律), 단책(丹責)

• 연안(延安, 황해북도): 김순립 (金順立)


이 중 순천 출신 5인은 원문에 ‘僧’(승려)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인성은 안용복 일행이 일본에서 송사를 벌일 당시 문서를 작성한 인물로 확인됩니다. 이러한 역할을 맡았다는 점에서, 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문식 계층이었거나 양반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단순한 생계형 어민이 아니라, 어선을 보유하거나 항해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조직자 또는 투자자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까지 항해해 송사를 벌인 점을 고려하면, 경제력과 조직 능력, 교섭력을 갖춘 해양 상업 계층 또는 중간층 지식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2. 국경을 지키기 위해 나선 백성들

조정에서는 울릉도를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오랫동안 시행해왔습니다.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고,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조정은 백성들의 문제 제기에 응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더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가 나서주지 않으니 백성 스스로가 나선 것이지요. 그 결과, 울릉도 침탈 문제에 대한 자력구제의 형태로
이들은 일본 관청을 찾아가 직접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송사(訟事, 소송)를 벌이게 됩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진정한 의미의 민간 외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외면이 아닌, 오히려 제재로 대응한 조선 조정

하지만 조정은 이 사건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안용복 일행이 귀국하자마자 강원 감사(江原監司) 심평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 사건은 곧바로 비변사(備邊司, 국방·외교·대외 사건을 다루던 최고 기구)로 이첩됩니다.

※ 보통 형사 사건은 형조(刑曹, 사법을 맡던 관청)에서 다루지만, 이번 사건은 단순한 불법 출국이 아니라 외교 문제로 판단되어 형조가 아닌 비변사를 통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처벌받은 인물은 안용복 단 한 명뿐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추정됩니다:

그는 일본어에 능통했고,

송사의 핵심 당사자였으며,

‘수도관’ 또는 ‘감세장’이라는 관직을 자칭하며 공식 문서를 작성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는 안용복에 대해 ‘어부’ 혹은 ‘능로군(凌虜軍)’으로만 표현하고 있어서, 그의 정확한 신분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 측 기록에는 그가 스스로를 “한양 사람 오충부의 사노비(私奴婢)”라고 밝히며, 이를 증명하는 호패까지 제시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이 사실이라면, 안용복은 실제로 사노비였을 수도 있고, 혹은 조선 조정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분을 낮춰 밝힌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외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요.

만약 그가 정말 사노비였다면,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안용복을 민간 외교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희생양’으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책임은 묻되, 정치적 파장은 최소화할 수 있었던 셈이니까요.

결국 조정은 그를 처벌함으로써

1) 국내적으로는 자의적 민간 외교 활동을 경고하고,

2)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조선 정부는 무관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것입니다.



4. 이름 없는 영웅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이 사건은 안용복 한 사람만의 업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10명의 백성들—특히 이름조차 남지 않은 이들—은
조정의 외면 속에서 자력으로 국경을 지키고자 한 조선 민중의 집단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항해는 역사책에서는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섬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울릉도, 그리고 독도. 이 섬들이 지금껏 대한민국의 영토로 존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이름 없는 백성들의 용기와 실천이 있었다는 사실, 우리는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참고 문헌 및 사료 출처]

• 『조선왕조실록』 숙종 22년 8월 29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실록 DB)

• 『승정원일기』 숙종 22년 9월 12일 기사

•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울릉도 관련 항목

• 박영규, 『조선왕조실록 인물사전』, 웅진지식하우스

• 김정섭, 「안용복의 도일과 조선의 해양 외교」, 한국해양사학회



#안용복 #울릉도 #독도 #조선역사 #조선왕조실록 #민간외교 #공도정책 #비변사 #승정원일기 #역사블로그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