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속 인물과 기록/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속 안용복 #11] [2-6] 숙종 20년 8월 14일 | 조선 외교의 품격 및 울릉도=죽도 동일성 재확인

CurioCrateWitch 2025. 6. 5. 00:22

 


[2-6]감사와 칭송 속에 숨겨진 항의
– 조선 외교의 품격, 죽도=울릉
도 동일성 재확인


📜 원문

"雖然我氓漁採之地, 本是鬱陵島, 而以其産竹, 或稱竹島, 此乃一島而二名也。 一島二名之狀, 非徒我國書籍之所記, 貴州人亦皆知之。 而今此來書中, 乃以竹島爲貴國地, 方欲令我國禁止漁船之更往, 而不論貴國人侵涉我境, 拘執我氓之失, 豈不有欠於誠信之道乎? 深望將此辭意, 轉報東都, 申飭貴國邊海之人, 無令往來於鬱陵島, 更致事端之惹起, 其於相好之誼, 不勝幸甚。" 倭差見之, 請改侵涉拘執等語。 集一不從。 倭差又請得第二書【請刪鬱陵二字之書。】之回答。 集一曰: "汝若受上船宴, 則吾當歸奏朝廷而成送之, 蓋權辭也。" 倭差遂受上船宴。 集一乃復命, 然倭差不肯歸。


📚 번역

"하지만 우리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하던 곳은 본래 울릉도이며, 이 섬에 대나무가 나므로 죽도라고도 부르니, 이는 하나의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 책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국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귀국에서 보내온 서계에는 죽도를 귀국의 땅이라 하며 우리 어선의 출입을 막으려 하면서, 귀국 사람이 우리 경계를 침범하고 우리 어민을 붙잡아 간 잘못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것이 진실하고 신의 있는 태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 뜻을 에도 막부(東都)에 전달하여, 귀국의 해안 지역 사람들이 울릉도로 왕래하지 못하게 엄중히 단속하여 또다시 분란이 일어나는 일이 없게 해 주신다면,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지키는 데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왜인 사신은 이 서계를 보고 ‘침범’, ‘구금’ 등의 표현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유집일은 이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인 사신은 또한 ‘울릉’이라는 글자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한 두 번째 서계의 회답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유집일은 “그대가 배 위에서 작별 연회를 받겠다면, 내가 조정에 돌아가 이를 아뢰고 보내 주도록 하겠다”고 말했으나, 이는 임기응변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왜인 사신은 결국 연회를 받고 서계를 수령하였으나, 끝내 귀국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 해설

이 문단은 조선이 일본의 울릉도 영유권 주장에 반박하고, 그들의 불법적 행위를 비판하는 동시에,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보여줍니다.


1. 일본 쇼군의 처우에 대한 칭송과 감사

도쿠가와 쇼군이 억류된 조선 어민들을 무사히 귀국시켜주었다는 점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특히 '노자(路資)', 즉 여비를 ‘후하게’ 제공했다는 표현은 외교적 예의를 갖추며 칭송을 더합니다.



2. 죽도=울릉도 동일성 재확인

조선은 “죽도는 곧 울릉도”라는 사실을 재차 명시합니다.

죽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조선 어민의 조업은 정당하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3. 우회적 비판과 외교적 품격

일본 측이 자신들의 침범과 억류 행위는 언급하지 않고, 조선에만 조치를 요구한 점을 은근히 비판합니다.

직설적인 표현 대신 “아쉬움이 남는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조선 특유의 절제된 외교 언어를 보여줍니다.



🧠 역사적 의의

이 문서는 조선이 울릉도(죽도)를 자국 영토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예의와 절제를 갖춘 항의문으로 외교적 정당성과 품격을 함께 세운 보기 드문 문장입니다.

특히 오늘날 독도 문제와 관련해 외교적 소통에서 품위 있는 단호함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참고 자료]

• 『숙종실록』 20년 8월 14일 기사

• 『조선왕조실록 속 안용복』 프로젝트 [2-6] 항목

• 동국문헌비고, 『증보문헌비고』 일본부 등 관련 외교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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