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숙종 20년 8월 14일
안용복의 일본 행적 파악과 외교적 압박
📜 원문 발췌
蓋安龍福ㆍ朴於屯, 初至日本, 甚善遇之, 賜衣服及椒燭以遣之, 又移文諸島, 俾勿問, 而自長碕島, 始侵責之。 對馬島主書契竹島之說, 是爲他日徼功於江戶之計也。 集一問龍福, 始得其實, 乃喝倭差曰: "我國將移書于日本, 備言侵責龍福等之狀, 諸島安得無事?" 倭差相顧失色, 始自折服。
📚 번역
안용복과 박어둔은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극진한 대우를 받았고, 옷과 후추, 촛불까지 하사받아 본국으로 돌려보내졌다. 나아가 일본은 다른 섬들에도 이들에 대해 더 이상 문책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나가사키(長碕島, 장기도)에 이르러, 일본 측은 조선의 배에 무단으로 접근하여 서계를 탈취하고, 일본 정부에 상소를 올린 안용복에게 책임을 묻고 질책하기 시작하였다.
쓰시마섬(對馬島, 대마도)의 번주(藩主, 일본 봉건 시대에 일정한 영토와 백성을 다스리던 지방 영주)가 서계(書契, 조선 시대에 일본과 주고받던 공식 외교문서)에 죽도(竹島) 문제를 명기한 것은, 훗날 에도(江戶) 막부에서 공로를 세우기 위한 정치적 계략이었다.
조선 조정은 안용복을 직접 심문한 뒤에야 비로소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에 접위관 유집일은 왜인 사신들을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서계를 보내어, 안용복 등을 침략하고 문책한 정황을 낱낱이 밝힐 터인데, 그렇게 되면 너희 여러 섬들이 과연 무사할 수 있겠는가?”
이에 왜인 사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빛이 창백해졌고, 마침내 스스로 굴복하였다.
🔍 해설
이 기록은 안용복 사건을 둘러싼 조선의 단호한 외교 대응과, 일본 측의 내부 이견과 정치적 계산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 일본의 이중적 태도: 일본은 처음에는 안용복 일행을 환대하며 송환하려 했지만, 나가사키에서는 문책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일본 중앙과 지방 간의 입장 차이 또는 외교적 혼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쓰시마 번주의 속내: 죽도 문제를 외교문서에 명기한 것은 실제 영토 주장보다는, 에도 막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습니다.
• 조선의 외교 승리: 조선은 이 사건을 단순한 어민 납치가 아닌 국가 간의 주권 문제로 인식하고 강력히 대응했습니다. 유집일의 발언은 조선이 울릉도와 죽도를 명백한 자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조선은 안용복의 진술을 바탕으로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하며, 일본 측의 불분명한 태도에 맞서 확고한 입장을 전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