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의 울릉도 이주 정책, 과연 ‘조선판 신도시 개발’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제 올린 글에서 저는 썸네일에 ‘숙종의 울릉도 신도시 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요.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에 남기고자 한 표현이었지만,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어 오늘은 ‘정조의 수원 화성 정책’과 비교해 보며 신도시라는 개념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숙종의 울릉도 이주 정책안은 정말 정조의 ‘신도시 개발 1호 타이틀’을 넘볼 수 있었을까요?
1. 신도시 개발, 그 현대적 의미
‘신도시’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서울의 강남, 판교처럼 주거·상업·교육·문화 기능이 통합된 대규모 계획 도시를 떠올리실 거예요.
이처럼 현대적 의미의 신도시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합니다.
1) 계획적 건설: 주거, 상업, 산업, 교통 등을 유기적으로 배치
2) 인구 재배치 기능: 대도시 과밀 해소, 산업 육성 목적
3) 대규모 기반 시설 조성: 행정 중심과 생활 인프라의 일괄 조성
2. 정조의 수원 화성, 왜 ‘최초의 신도시’로 불릴까?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신도시’라 하면 보통 정조의 수원 화성 건설을 떠올립니다.
단순한 읍성 건축을 넘어서, 정조는 다기능 복합 도시를 계획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왕권 강화와 지역 균형 발전을 도모했고,
택지 분배와 상업 진흥, 군사적 거점 마련을 모두 고려했으며,
수도 한양의 인구 일부를 옮겨 자발적 정착을 유도하기도 했죠.
이처럼 수원 화성은 오늘날 신도시 개념에 부합하는 조선판 ‘계획 도시’였습니다.
3. 숙종의 울릉도 이주 정책안, 어떤 점이 다를까요?
숙종 20년(1694), 영의정 남구만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올립니다.
“백성을 울릉도에 살게 하자(募民以居, 모민이거), 그리고 군사 거점을 설치해 섬을 지키자(設鎭以守, 설진이수).”
숙종은 처음에 이를 수용합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곧 ‘주기적 수색’ 중심의 정책으로 방향이 바뀝니다.
이러한 정책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현대적 신도시와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1) 도시가 아닌 안보 거점: 주민 생활 기반 조성보다 군사적 감시와 방어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2) 지형적 제약: 울릉도는 경작지와 평지가 부족해 대규모 이주나 정착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3) 계획 부재: 주거지 설계, 인구 재배치, 도시 기반 시설 조성 등 구체적 도시 계획 요소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4. ‘신도시’는 아니지만, '실효 지배 강화'를 위한 검토안이었다
숙종의 울릉도 정책안은 비록 정조의 수원 화성처럼 실행된 도시 계획은 아니었지만,
조선이 울릉도를 단순히 비워 두는 섬이 아닌 직접 관리해야 할 영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전환점이 됩니다.
임금은 주기적 수색 방식의 '수토(搜討) 정책'을 재확인하고 적용하며, 울릉도에 대한 실효 지배를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방안을 선택합니다.
이는 태종 시기의 공도 정책이 완전한 방치가 아니었으며, 조선이 꾸준히 울릉도를 점검하고 관리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5. 결론: 신도시 개발은 아니지만, 조선의 ‘영토 의식’이 반영된 정책안
결론적으로, 숙종의 울릉도 정책안은 정조의 수원 화성처럼 계획적이고 종합적인 도시 건설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현실적 외교 감각과 주권 의식이 반영된 실천 가능한 영토 관리 구상이었죠.
수원 화성이 조선의 ‘도시 비전’을 실현한 사례였다면, 울릉도는 조선이 ‘영토를 직접 관리하려는 감각과 의지’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