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속 인물과 기록/조선왕조실록

[별책부록 #3] 공도정책과 실효지배: 조선은 실효지배를 놓쳤던 것인가, 아니면 지켜낸 것인가?

CurioCrateWitch 2025. 6. 4. 16:38


📌 공도정책과 실효지배: 조선은 실효지배를 놓쳤던 것인가, 아니면 지켜낸 것인가?


조선의 공도정책은 흔히 ‘섬을 비웠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영토 포기와 동일시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공도정책은 주권을 수호하고 외세의 침탈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조선은 실효지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영토를 관리하며 실효지배를 이어갔습니다.



1. 공도정책이란?
1차 사료 분석을 통해 본 공도정책의 실체

1. 『태종실록(太宗實錄)』 – 공도정책의 기원

📜 원문

태종 17년(1417) 2월 23일 기사

遣慶尙道觀察使金重寶諭之曰, 鬱陵島本非可居之地, 而倭人往來騷擾, 民不獲安。 自今悉移其民於陸地, 無使舟船更往。 若有違越潛居者, 嚴治之。


📚 번역

경상도 관찰사 김중보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하였습니다.

“울릉도는 본래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은 아니지만, 왜인들이 왕래하며 소요를 일으켜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섬에 있는 백성들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켜, 다시는 배가 그곳에 왕래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이를 어기고 몰래 들어가 사는 자가 있다면 엄히 다스릴 것이다.”


🔍 해설

『태종실록』은 공도정책이 단순한 포기나 방치가 아니라,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조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왜구의 침입은 단순한 약탈을 넘어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수준이었고, 울릉도는 이들에게 전초기지로 이용될 위험이 컸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섬을 비우되, 주권은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공도정책을 실행한 것입니다.


2.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토 명시

📜 원문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 조

鬱陵島 在縣正東海中。 新羅時稱鬱陵, 或稱羽山。 方百里。 縣去不遠, 晴日可見。 于山鬱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晴日可見。


📚 번역

울릉도는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에 있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울릉’이라 하였고, 또는 ‘우산’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섬의 크기는 사방 100리이고, 울진에서 멀지 않아 맑은 날이면 육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모두 울진현 동쪽 바다에 있으며, 서로 멀지 않아 맑은 날엔 가시권 안에 있습니다.


🔍 해설

이 기록은 울릉도와 우산도(오늘날 독도)가 조선 본토에서 관측 가능하고, 조선 영토로 명백히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단지 지리적 위치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행정적 관할과 감시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공도 이후에도 이어진 실효지배

📜 원문
『동국여지승람』 권43,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 조


鬱陵島 在本縣東海中。 周回一百里。 縣去不遠, 晴日峰巒樹木 自陸地歷歷望見。 于山島鬱陵島 在蔚珍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晴日可見。 古有無人居之。 蓋倭寇荒亂 故空其地。 每年觀察使遣搜討官往來搜檢。


📚 번역

울릉도는 울진현 동쪽 바다에 있습니다. 둘레는 100리이며, 현에서 멀지 않아 맑은 날이면 산의 봉우리와 나무들이 육지에서 뚜렷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우산도와 울릉도는 울진현 동쪽 바다에 있으며, 두 섬은 서로 가깝고 맑은 날이면 육지에서도 관측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살았으나 왜구의 침입으로 황폐해져 섬을 비우게 되었으며, 매년 관찰사가 수토관을 파견해 수색과 점검을 실시했습니다.


🔍 해설

『동국여지승람』은 『세종실록지리지』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조선의 실효 지배 방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토관(搜討官)’은 단순히 순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섬에 잠입한 외세를 수색(搜)하고 필요 시 토벌(討)하는 임무를 맡은 관원입니다. 이는 단순한 기록 수준을 넘어, 조선이 정기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으로 영토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 공도정책과 실효지배: 포기인가, 지속인가?


조선의 공도정책은 ‘섬을 비웠다’는 사실 하나로 영토 포기라고 오해되기 쉬우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권을 수호하고 외세의 침탈을 막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으며, 국방력의 한계를 고려한 현실적 조치였습니다.


태종 대에는 백성의 안전을 위해 울릉도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켰고, 그 이후로도 조선은 수토관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여 섬을 감시하고 관리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는 매년 반복된 공식적인 업무였습니다.
이는 현대 국제법상 실효지배 요건인 ‘제도적·행정적 관리’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조선은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자국 영토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관리 행위도 이어갔습니다. 공도정책은 단순한 방치가 아니라, 일시적 철수 속에서도 주권을 실질적으로 유지한 전략이었습니다.

한편 유튜브나 일부 온라인 공간에서 보이는 ‘범죄자의 도피처 방지’, ‘세금 회피 방지’ 등의 목적은 공식 사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민간의 추측성 해석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태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그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목적의 공도정책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조선의 공도정책은 외세의 침입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주권을 실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실효지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영토를 지키려 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