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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속 인물과 기록/승정원일기 41

[별책부록 #3] '다케시마(竹島, 죽도)’ 명칭의 대상 변화 (울릉도 ➡️ 독도)

‘죽도(竹島, 다케시마)’ 명칭의 대상 변화 (울릉도 ➡️ 독도) ▪︎ 조선시대 안용복 사건 이전: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라고 칭하며 자국 영토로 위장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는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섬)와 돗토리번 등 일본 내 지방 세력의 움직임이었습니다. ▪︎ 안용복 사건 이후 ~ 메이지 시대 이전: 일본 내부의 행정 구역 및 영유권 경계가 불분명했던 상황과 맞물려, 울릉도와 독도(조선 측 명칭: 자산도 또는 우산도)를 혼동하거나 함께 언급하는 사례가 나타났습니다. ▪︎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정부가 해양 영토 확장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내면서, 기존에 울릉도를 지칭하던 '죽도'라는 명칭이 독도에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명칭 대상이 실질적으로 전환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17] [3-7] 숙종 22년 10월 13일 하책의 논리, 조선 외교의 무너진 자존

[3-7] 숙종 22년 10월 13일하책의 논리, 조선 외교의 무너진 자존📜 원문至若馬島用奸欺我之狀, 則不問而置之, 龍福呈文辯正之罪, 則先論而殺之, 惟求得免於島主之憾恨, 其示弱甚矣。且島主之意, 雖內以快其讐爲幸, 外必不肯釋然感謝於我, 今後凡事, 少有不如其意者, 反必以龍福藉口, 爲侮脅我國之語柄, 不久將以鬱島執言, 而連續送差, 我何以堪之乎? 似是下策云。📝 번역만약 대마도가 우리를 기만한 행위는 묻지 않은 채, 오히려 안용복이 상소문을 통해 일본의 허위를 바로잡은 것을 먼저 문제 삼아 죽이려 한다면, 그것은 도주의 노여움을 피하려는 비굴한 태도일 뿐입니다.설령 도주는 그로 인해 속이 시원할지라도,겉으로는 결코 조선에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앞으로 조금이라도 그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안용복 사건..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16] [3-6] 숙종 22년 10월 13일 울릉도 문제, 조선의 선택은?

숙종 22년 10월 13일 울릉도 문제, 조선의 선택은?[3-6]📜 원문鬱島事, 使倭人不敢更有所開口, 則狡倭嘗試之計, 庶可少縮矣。操縱之權在我, 而日後之患可慮, 此實不可失之機, 乃是上策也。如不能然, 亦宜使東萊府使, 送書於島主, 先陳龍福擅自呈文之罪, 更陳本島奪取龍福公文之狀, 且陳本島虛稱竹島之失, 分數開說, 委曲措辭, 待其回答, 然後處之, 可也。然彼島, 嘗有活我漂民之恩, 所以屢致餽報, 今擬送文, 當亦緩語以寬之。 龍福斷罪之意, 決不可語及於書契中矣, 此爲中策也。 龍福斷罪之意, 決不可語及於書契中矣, 此爲中策也。📝 번역울릉도 문제와 관련해 일본 측이 더는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만든다면, 그간 왜인들이 교묘하게 시도해온 외교적 술책 역시 어느 정도 수그러들 것입니다.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지금, 장차 생겨날 외교적 ..

[별책부록 #2] 안용복 사건, 대마도 중심 외교 체계를 뒤흔들다

📌 대마도 중개외교: 안용복 사건과의 관계 안용복 사건은 이처럼 오랫동안 고착되었던 대마도 중심의 중개 외교 구조를 뒤흔든 결정적인 사건였습니다.당시 울릉도와 독도(조선에서는 우산도 또는 자산도로 인식)는 조선 어민들에게 중요한 어장이었지만, 일본 측의 무단 침범과 어로 활동이 빈번하여 조선 어민들과의 마찰이 잦았습니다. 안용복의 행동은 이러한 어업권 침해 문제와 영토 인식의 갈등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안용복은 조정의 공식 명령 없이 일본에 건너가, 기유약조가 정한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일본 본토의 관청(호키슈, 현재의 돗토리현)에 직접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는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하고, 일부 일본 관리로부터 조선의 영유권을 인정받는 문서를 확보하기도 하였습..

[별책부록 #1] 조선은 왜 대마도를 통해 일본과 간접외교를 했을까

[별책부록 1부] - "조선은 왜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섬)를 통해 일본과 간접외교를 했을까?" 📌 기유약조와 대마도의 중개 외교 체계 (선조 42년, 1609년)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왜구의 재발을 방지하고, 일본과의 국교를 안정적으로 재개하기 위해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였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조선과 일본 간의 국교 정상화를 의미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본토의 에도 막부가 아닌 쓰시마섬(對馬島, 대마도) 도주를 상대로 맺은 약속이었으며, 이후 200년 가까이 유지된 외교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조약이었습니다.기유약조는 양국이 국교를 재개한다는 외형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본토가 아닌 지방 정권인 대마도주와 맺은 점에서 이미 비대칭적인 외교 구조의 출발을 보여주고 있었습니..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15] [3-5] 숙종 22년 10월 13일(1696년) - 조선, 외교 주도권을 되찾으려 하다

[3-5] 숙종 22년 10월 13일 - 조선, 외교 주도권을 되찾으려 하다📜 원문至於事係鬱島, 變幻欺謾之狀, 不可不因此機會, 使萊府送書馬島, 條列詰問, 明辯而痛斥之矣。彼若更有巧飾不服之言, 自我又送書以問曰,汝居兩國間, 凡事之無信如此, 龍福, 以漂風賤氓, 無國書, 自爲呈文, 日本之不可取信, 固也。自朝廷, 將欲別遣使臣於日本, 以審其虛實, 汝將何以處之云爾,則馬島倭, 必大生恐㤼, 服罪哀乞。夫然後, 龍福之罪, 自我議其輕重而處之。📝 번역이 사건은 울릉도와 관련된 문제이며, 왜인들이 지속적으로 보여온 외교적 기만을 고려할 때,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따라서 조정은 동래부를 통해 쓰시마섬(對馬島, 대마도)에 공문을 보내, 사안별로 조목조목 추궁하고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힌 뒤, 단호하게 꾸짖어야 할 것입..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14] [3-4] 숙종 22년 10월 13일(1696년) | 안용복이 폭로한 대마도의 민낯

[3-4] 숙종 22년 10월 13일안용복이 폭로한 대마도의 민낯📜 원문龍福之冒禁再往鬱島, 及漂到他國, 假稱監稅, 將至於上疏呈文, 挑出事端之罪, 固不容誅矣。然而對馬倭之假稱鬱陵以竹島, 虛托江戶之狀, 欲使我國禁人往來於鬱島, 其中間欺誑操弄之狀, 今仍龍福而畢露, 此則亦一快事也。龍福之有罪無罪, 當殺不當殺, 自我國徐當議處, 馬島之米·木·紙等減分細瑣之事, 皆不當擧論矣。📝 번역안용복이 금령을 어기고 다시 울릉도로 간 일, 그리고 떠밀려 타국에 도착한 후 ‘감세(監稅)’로 가장해 상소문을 제출한 행위는사태를 촉발시킨 중대한 위반이며, 결코 용서받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하지만 쓰시마섬(對馬島, 대마도)가 울릉도를 ‘죽도(竹島)’라 칭하며 일본 영토로 위장하고,에도 막부에 허위 보고를 하며 조선을 기만한 행위는 이번 사..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13] [3-3] 숙종 22년 10월 13일(1696년) | 안용복 1차 도일, 재평가대에 오르다

[3-3] 숙종 22년 10월 13일 - 안용복 1차 도일, 재평가대에 오르다 📜 원문 領府事南九萬以爲, 龍福, 癸酉年, 往鬱島, 被擄於倭人, 入去伯耆州, 則本州成給鬱島永屬朝鮮公文, 且多有贈物, 出來時, 路由馬島, 公文·贈物, 盡爲馬島人所奪云, 而不以其言, 爲必可信矣。今見龍福, 再往伯耆州呈文, 則前言似是實狀。 📝 번역 영부사 남구만이 말하길, "안용복은 계유년(1693년)에 울릉도로 갔다가 왜인에게 사로잡혀 일본의 백기주로 끌려갔습니다. 그때 그곳 관리가 울릉도가 조선에 속한 땅임을 공문으로 작성해 주었고, 많은 선물도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귀국할 때 마침 대마도를 거쳐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모든 공문과 선물을 대마도인이 빼앗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그의 말은 믿기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12] [3-2] 숙종 22년 10월 13일(1696년) 윤지완, 안용복을 두고 외교적 셈법을 고민하다

숙종 22년 10월 13일윤지완, 안용복을 두고 외교적 셈법을 고민하다[3-2]📜 원문領敦寧府事尹趾完則以爲, 安龍福, 私往他國, 猥說國之重事, 彼或認爲朝廷所使, 則事之可駭, 莫此爲甚…(이하 생략)📝 번역돈녕부사 윤지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안용복은 조정의 허락 없이 사사로이 다른 나라에 건너가 국가의 중대한 사안을 이야기했습니다. 일본이 그를 조정의 사절로 오해하게 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죄로 따지면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그러나 대마도는 조선을 속이며 오랫동안 에도 막부와의 통로를 독점해왔습니다. 조선이 다른 길을 알아버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마도는 불쾌하고 두려울 것입니다. 만약 안용복이 처형되면, 그 길이 영영 막혔다고 여겨 대마도가 기뻐할지도 모릅니다.법대로라면..

[승정원일기 속 안용복 #11] [3-1] 숙종 22년 10월 13일 (1696년) - 안용복 사건, 본격적인 논의의 막이 오르다

숙종 22년 10월 13일 (1696년) - 안용복 사건, 본격적인 논의의 막이 오르다[3-1]📜 원문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左議政尹趾善所啓, 安龍福事, 備局郞廳, 問於在外大臣處, 書其所言而來矣。📝 번역대신들과 비국 당상들이 임금 앞에서 국정을 아뢰는 자리에서, 좌의정 윤지선이 보고드렸다."안용복 사건과 관련하여, 비국 낭청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외부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리해왔습니다."🔍 해설: 개인의 월경을 넘어 국가적 사안으로이 장면은 조선 조정이 안용복 사건을 얼마나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다루려 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좌의정 윤지선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대신들의 의견까지 수합하여 보고하는데, 이는 단순한 내부 논의를 넘어 고위 관료 전체의 입장을 통합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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