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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이란 #3] 70년 이란 핵갈등의 뿌리 – 석유, 쿠데타, 핵개발, JCPOA와 반미(反美)의 시작

CurioCrateWitch 2025. 6. 22. 20:28

💥 [미국과 이란 #3] 70년 이란 핵갈등의 뿌리 – 석유, 쿠데타, 핵개발, JCPOA와 반미(反美)의 시작


1953년 쿠데타부터 핵 협상 붕괴까지, 70년을 뒤흔든 갈등의 실체

미국이 이란 핵시설에 정밀 미사일을 타격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단발적인 충돌 뒤에는 무려 70년이 넘는 복잡하고 깊은 갈등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미국과 이란의 대립은 단순히 종교나 핵무기 개발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 뿌리에는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깊이 얽혀 있으며, 이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연속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양국 관계의 핵심 분수령이 된 1953년 이란 쿠데타부터 현재의 핵 갈등까지, 그 복잡한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며 미국-이란 갈등의 진짜 실체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 1. 석유와 쿠데타 – 미국과 영국의 '이란 접수'

📍 배경: '페르시아 석유는 영국의 것'?


1908년, 영국은 이란 남서부 마스제드 솔레이만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영국 정부는 이란의 석유 개발권을 독점하기 위해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를 설립했고, 이 회사는 오늘날 거대 석유 기업인 BP(British Petroleum)의 전신이 됩니다. 영국은 AIOC의 대부분 지분을 소유하며 이란 석유의 막대한 이익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이란인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극히 미미했고, 이는 민족주의적 반감을 키우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 모사데그 총리의 과감한 결단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1년, 강력한 민족주의자였던 무함마드 모사데그가 이란 총리로 취임합니다. 그는 "석유는 이란인의 것"이라는 국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 석유 산업 국유화를 단행합니다.

이는 영국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죠. 영국은 즉시 이란 석유에 대한 금수 조치를 내리고, 국제 석유 시장에서 이란 석유를 보이콧하며 극심한 경제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란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모사데그 총리는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굴하지 않았습니다.


🕵️ 미국의 개입: 1953년 쿠데타


영국은 혼자서는 모사데그를 제어하기 어렵다고 판단, 냉전 시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던 미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결국 1953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영국 정보부(MI6)가 합작하여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키는 비밀 쿠데타(Operation Ajax)를 감행합니다.

이 작전으로 모사데그 총리는 축출되었고, 미국의 강력한 지지 아래 친미 성향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이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미국을 '자유를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후견인'으로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 2. 팔레비 시대와 핵개발 – 친미 정권의 '양날의 검'

👑 서구화와 억압의 공존


쿠데타 이후 집권한 팔레비 국왕은 미국의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이란 사회를 서구식으로 개발하고 근대화하려 했습니다. 대규모 인프라 건설, 교육 확대, 여성 인권 신장 등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동시에 국왕은 비밀경찰(SAVAK)을 동원하여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이러한 억압적인 통치 방식은 국민들 사이에 깊은 분노와 반감을 심었고, 이슬람주의자민족주의자들은 비밀리에 저항 운동을 조직하며 혁명의 불씨를 키워나갔습니다.

⚛️ 핵개발의 아이러니한 시작은 미국으로부터


놀랍게도, 이란 핵개발의 시작은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1970년대 미국은 '원자력 평화이용(Atoms for Peac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란에 연구용 원자로와 우라늄을 제공했습니다.

당시 팔레비 국왕은 이란을 중동의 강대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고, 미국과의 협력 하에 대규모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계획하며 핵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서방의 감시와 통제 하에 '평화적 목적'으로 진행되는 듯 보였습니다.



🧕 3. 1979년 이슬람 혁명 – '반미'의 불꽃이 타오르다

☪️ 혁명과 친미 정권의 붕괴


팔레비 국왕의 억압적인 통치와 서구화 정책에 대한 불만이 임계점에 달하자, 결국 1979년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혁명이 발생합니다.

이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이란은 서방과는 전혀 다른 신정 체제의 이슬람 공화국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혁명 이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이 점거되고 미국인들이 인질로 잡히는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444일간 지속)은 양국의 적대감에 기름을 붓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고, 이는 미국인들에게 '이란=적대국'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주었습니다.


🚫 핵개발 중단 그리고 다시 재개


이슬람 혁명 초기, 호메이니 정권은 서구 기술의 상징인 핵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이란은 자체적인 핵 기술 개발을 추진하며 러시아, 중국 등과 협력하여 다시 핵 개발을 본격화합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 중"이라는 강력한 의심을 제기하며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시작했고, 핵 개발은 양국 갈등의 새로운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 4. JCPOA에서 탈퇴까지 – 긴장의 나선형 고조

🤝 2015년 핵합의: JCPOA


이란의 핵 개발이 국제적 불안을 고조시키자, 오바마 행정부는 외교적 해법을 모색합니다. 2015년, 이란과 주요 6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러시아) 간에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이 체결됩니다.

이 합의에 따라 이란은 핵 활동을 대폭 제한하고 국제사회의 철저한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과 서방은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일부 해제했습니다. 이 시기는 일시적으로나마 '핵으로 인한 전쟁' 가능성이 낮아진 평화로운 국면이었습니다.


🚫 2018년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탈퇴


하지만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 핵합의가 "최악의 거래"라며 일방적으로 JCPOA에서 탈퇴하고, 이란에 대한 강력한 경제 제재를 복원합니다. 이 조치로 인해 이란 경제는 다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이란은 이에 맞서 핵합의에서 정한 핵 활동 제한을 점차 어기며 고농축 우라늄 생산을 재개했습니다. 상호 불신과 긴장은 다시 폭발 직전으로 치달았고, 현재의 핵시설 공격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 정리하며


끝나지 않는 갈등의 그림자
미국과 이란의 갈등은 단순히 최근의 군사적 긴장이나 핵 문제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 뿌리는 1953년 쿠데타로 시작된 석유를 둘러싼 이권 다툼, 팔레비 왕조의 억압적 통치와 핵 개발, 1979년 이슬람 혁명의 반미 정서, 그리고 복잡한 외교 협상과 실패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에 걸친 복합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겹겹이 쌓인 결과입니다.

이번 이란 핵시설에 대한 미사일 발사는 이러한 복잡한 갈등 구조 위에서 터진 상징적인 '폭발'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역사적 불신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미국과 이란의 갈등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다음 글 예고

📌 [미국과 이란 #4] 드론과 벙커버스터 – 미국은 그 지하 핵시설을 어떻게 타격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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